에세이 PICK16

셸리북스 에세이

[셸리북스 에세이픽 3] 그해 오달지게 비가 많이 왔다_남궁인 작가

발행일 2022-08-17

그해 오달지게 비가 많이 왔다

 

남궁인

 

2005년 여름 나는 젊었다. 생물학적으로 젊기도 했지만, 젊음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나는 당장 일 분 일 초가 지나가고 있음이 너무 아쉬웠다. 무엇인가 지금 나만이 할 수 있는 거대한 일이 주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세상에서 제공하는 모든 고통과 고난을 기꺼이 견딜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심지어 고통과 고난이 제발 나에게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있었다. 고리타분한 의대생으로 대학 시절을 평범하게 보낸다는 것이 너무 끔찍했다. 튀고 싶었고 달성하고 싶었고 돋보이고 싶었다.

 

그 때 바야흐로 국토대장정이 유행했다. 사람들은 친구와 같이 가거나 커뮤니티를 만들거나 조직된 단체에 들어가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국토대장정을 수행했다. 그 세태를 바라보며 나는 국토대장정을 한 번은 완수해야지만 대학 시절이 지나갈 것임을 직감했다.

 

가장 유명한 건 지금까지 22회차로 이어지고 있는 박카스였다. 나는 5회와 6회에 원서를 넣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이런 회차수를 셈하면 갑자기 세월을 느낀다. 또 박카스 국토대장정은 삼시 세끼 박카스가 한 병씩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주는지 모르겠다. 아니 진짜로 줬는지부터 모르잖아. 하여간 이런 국토대장정 선발은 모두 서류 전형이었는데, 경쟁률이 만만치 않았다. 대학생이라면 한 번쯤 이런 고행을 거쳐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자학러들이 예나 지금이나 많았다.

 

그때 택진이 형이 처음 사회사업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이 택진이형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택진이형' 할 때 떠올리는 그 분이 맞다. 당시 리지니로 돈을 많이 벌었고 막 리니지2를 만들어 돈을 더 많이 벌고 있던 그는 사회에 공헌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국토대장정을 떠올렸다. 대학생을 선발해 엔씨소프트 로고가 박힌 옷을 입히고 훨씬 더 고된 일정으로 국토종주를 시키는 것이다. 동시에 언론사도 부르고 연예인도 부르고 가수도 부르고 정치인도 부르고 창단식도 거창하게 해서 사회 공헌 사업으로 적당히 홍보도 해보자, 라고 생각했다.

 

당시 택진이형은 지금 나와 동갑이다. 그때 택진이형 나이가 왜 이렇게 많아 보였는지 모르겠다. 회장님이라는 위압감도 있었고, 나와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이 지나치게 젊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택진이형이 15년 뒤까지 리니지와 리니지2, 두 개의 게임만 줄기차게 우려서 돈을 더더욱 어마어마하게 벌 것이라고 상상한 사람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대단한 일이다. 하여간 택진이형은 '문화원정대'라는 이름으로 산악인 고 박영석을 대장으로 삼아 원정길에 오르게 된다.

 

나는 숙식이 공짜이며 일부 의류까지 제공되는 이 원정에 숙명처럼 참가하고 싶었다. 어쭙잖은 문학청년이었던 나는 그때까지 쓸 수 있었던 가장 나은 문장을 짜집기해서 자기소개서를 썼다. "제 몸은 지금 제 방에 앉아 있지만, 제 심장만은 이미 대장정의 여로를 걷고 있습니다." 현대 단편소설의 창시자 안톤 체호프가 무덤에서 뛰어나와 바짓가랑이를 잡고 만류할 정도의 문장이었다. 하여간 이 자소서는 어찌어찌 담당자의 의협심을 자극하고야 말았다. 나는 44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제 2회 문화원정대에 유일한 의대생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여정은 25박 26일간이었으며, 707킬로미터를 걸으면 되었다. 방학 다음 날 바로 출발하는 일정이었고, 남녀 64명씩 128명이 16개 팀으로 나누어서 행진했다. 나는 그때 이미 인생에서 너무 많이 걸어, 707킬로쯤이야 동네 마실 다녀오듯 호로록 다녀오면 될 것 같았다. 평소 여행 떠날 때처럼 여분의 신발도 없이 스포츠 샌들 하나만 신은 채로 팀에 합류했다. 나를 처음 만난 팀장님은 유일한 의대생이 조금 모자라는 친구라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다른 팀원의 운동화를 빌려 신어야 했다. 이윽고 서울 시청 앞에서 발대식을 했는데 무려 이명박 시장님이 참석했다. 그다음 우리는 포항으로 내려가서 남해안을 횡단해 목포로 가는 일정에 돌입했다.

 

약 150여 명이 자체적으로 음식도 만들고 설거지도 하고 잠자리도 마련해가면서 707킬로미터를 걷는 일이라니. 그것은 공인된 지옥에 가까웠다. 일단 물주는 택진이형이었다. 그는 기업가로 자금을 담당했다. 하지만 기업 내부에서는 국토대장정을 진행할 수 없었다. 실제 통솔단은 고 박영석 대장님을 위시한 산악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든 것을 군대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딱 오달지게 많이 걷는 군대 체험이었다. 모든 대원들은 외부의 연락 및 휴대전화 사용이 금지되었다. 면도와 이발도 금지. 음료는 끓인 보리차만 지급. 남녀 불문 샴푸와 바디클랜저 사용도 금지. '오와 열' 구령을 붙여 행진. 때때로 기합. 매일 아침저녁 구령대에서 훈시도 듣고 벌점과 퇴소 조치까지, 정확히 군대 문화였다.

 

구체적 일정은 이랬다. 아침 여섯 시에 노을의 '붙잡고도'를 들으며 눈뜬다. 간단히 세면을 마치고 아침을 받아서 간이 테이블에서 먹는다. 간밤에 잤던 텐트를 직접 걷고 운동장에 열 맞춰 선다. 아침 조회를 마치고 훈시를 듣고 체조하고 행진곡 틀어놓고 걷기 시작. 50분 걷기 10분 휴식 4타임. 미리 준비된 야영지에서 식판에 밥 떠서 길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배식 팀 트럭이 우리를 따라다닌다. 모두가 땀을 많이 흘렸기에 음식이 대체로 짰다.) 다시 50분 걷기 10분 휴식 4타임. 그날 묵을 야영지(보통 초등학교)에 도착하면 운동장에 직접 못 박아 텐트를 친다. 이제 빨래하고 몸을 씻고 빨래 널고 저녁 먹고 모여서 진행 팀장님 말 듣고 캠프 팀장님 말 듣고 편지 낭독하고 가끔 산 올라가는 방송 보다가 잔다. 불침번도 서야 한다. 이를 26일 반복하면 완 to the 주였다.

 

일단 모든 사람들은 아팠다. 누가 누가 물집 많나 대결을 벌일 판이었다. 그냥 다들 다리가 아작나는 수준이었다. 우리끼리 다들 물집 위에 떠다니고 있다고 표현했다. 밤마다 물집 꿰매다가 자는 게 각자 일이었다. (의사가 되어서도 그렇게 심한 물집은 아직 못 봤다.) 나도 참 적극적으로 아팠다. 게다가 150명이 수도 한두 개로 씻다 보니 불결하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남녀 가릴 것 없이 알몸에 판초 우비를 입고 수돗가로 가서 호스를 우비 안에 넣고 씻었다. 워낙 서로 죽을 판이라서 민망하고 할 것도 없었다.

 

가끔 남자 화장실에서 따로 씻는 날에는 정말 수용소를 방불케 했다. 우리 팀 열여섯 명이 알몸으로 좁은 화장실에 바닥에 선다. 한 명이 한 쪽에 서서 호스를 들고 물을 마구 뿌린다. 다들 정도껏 몸을 적신다. 그리고 각자 비누칠을 한다. 다들 비누기가 충만해지면 다시 한 사람이 호스를 들고 한 쪽에서 물을 마구 뿌려 각자 헹군다. 이게 수도 한 개로 한 팀 열여섯 명이 동시에 씻는 방법이었다. 그중 나 같은 귀차니스트들은 옷을 입은 채로 샤워와 빨래를 동시에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정을 보면, 어딘가 건물에 들어가지 않는다. 밤에 텐트 안에 들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한 여름 내내 에어컨은 한 번도 쐴 수 없고, 콘크리트 천장 아래서 잘 수도 없었다. 하필 2005년 여름 어마어마한 비가 내렸다. 장마의 시작부터 끝까지 내리는 모든 비를 우비만 입고 몸으로 직접 다 맞는 것이다. 비. 계속 내리는 엄청난 양의 비. 인체와 옷가지와 신발을 다 적셔버리는 비.

 

하루는 눈을 뜨자 몸이 물에 반쯤 잠겨 있었고, 텐트 안 모든 물건이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바깥에 나가자 운동장이 거대한 수영장 같았다. 우리는 주최 측이 우리를 어디 건물로 피신시켜줄 줄 알았는데, 일정 관계상 우리는 아침에 생쥐같이 젖은 몸으로 퉁퉁 불은 발을 기어코 신발 안에 욱여넣고 물살을 헤치고 장맛비를 맞으며 길을 떠나야 했다. 내 인생에 어떤 일이 더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장담컨대 잠자리에 물이 차서 눈뜨는 경험도 다신 못해볼 것 같고, 그딴 환경에서 걷는 일도 다신 없을 것 같다. 그해 나는 모든 장맛비를 결국 몸으로 다 맞아 냈다. 그 전까지는 비 맞는 일을 좋아했는데, 그 뒤 15년간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다. 내 인생의 비는 그 국토대장정으로 전후로 나눈다. 정말 그냥 오달지게 비가 많이 왔다. 비가 그치자 이번에는 뙤약볕이 쏟아졌는데, 모조리 우리를 쉰내 나는 토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영락없이 사극에 나오는 엑스트라 꼴이었다.

 

당시 연예가 중계에서 '국토대장정 응원을 나선 연예인들'이라는 꼭지를 촬영했다. 당시 우리 팀에 응원을 와서 밥을 떠줬던 연예인은 중년 여성 배우 김O동과 사O자였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처음 20분만 걷다가 차를 타고 점심 식사 장소로 떠났으며, 잠깐 밥을 뜨다가 분량이 다 나오자 집에 갔다. 그때 연예계의 냉혹함을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잠깐 고 박영석 대장님과 친했던 만화가 허영만이 방문하기도 했고, 막판에는 우리를 위해 택진이형이 가수를 불러 공연을 열어주었다. 당시 클래지콰이와 불독맨션과 언니네 이발관이 왔다. (그렇다 NC는 그때도 돈이 많았다.) 그들은 지방에서 딱 128명 관객을 앞에 두고 하는 행사라서 별 기대감이 없이 찾아온 것이 역력했다. 하지만 워낙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격양되어있던 우리가, 킹덤에 나오는 농민13이나 농민28 같은 모습으로 택진이형과 기차놀이를 하면서 눈알을 뒤집고 덩실거리며 놀자 초대가수들은 대단히 놀랐다. 모두가 신나게 두 배쯤 길이의 앵콜을 부르고 갔다. 그들도 분명히 15년 전의 이 유난한 행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땅끝마을을 거쳐 26일 만에 목포에 도착해서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처음 유달경기장에서 택시를 타고, 한 달 만에 바퀴 있는 무엇인가에 탑승하자 그 승차감에 우리는 매우 놀랐다. 택시가 출발하자 우리는 이상한 느낌에 소리를 질렀는데, 기사님이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어서 아뇨, 저희가 한 달만에 바퀴 있는 차를 처음 타서, 라고 했었다. 그야말로 이상한 친구들이였다. 뒤풀이를 하고 다음 날 아침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타본 KTX였다.

 

그 뒤로 열네 번의 장마가 더 지났다. 사람들은 많이 달라졌다. 우리 팀의 한 커플은 무려 결혼에 골인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경찰관이나 강사나 회사원이나 감정평가사가 되거나 미국인과 결혼을 하거나 기타 다양한 사회인이 되었다. 택진이형은 문화원정대를 이후 두 번만 더 열었고, 그 뒤 프로야구팀을 만들었다.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어서 못 볼 꼴을 보셨고 김O동과 사O자는 나이를 먹었고 허영만의 타짜는 대박이 났고 알렉스는 타인의 발을 씻겼고 이한철은 나와 같은 크루즈를 두 번 탔고 이석원은 작가가 되어 블로그에 내 책을 소개했고 고 박영석 대장님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실종되셨고 나는 장례식에서 울면서 돌아와 시를 썼고 그 뒤로 KTX를 많이 탔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나는 왼발 아치가 무너져서 지금도 오른발보다 1cm나 더 크고, 당시 노스페이스 카탈로그에도 출연했다. 처음에는 2005년 여름 비 많이 맞은 ssul을 쓰려고 했는데, 15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그때 나와 동갑이었던 택진이형을 많이 생각했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때도 지금도 변하지 않고 그랬다.

 

😺 셸리의 말 : 당신의 가장 뜨거웠던 한 시절은 언제인지 궁금하오. 나 셸리는 반려묘와 많은 시간을 보낸 이번 여름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소. :)

[셸리북스 에세이픽 4] 이런 나로도 잘 살아보고 싶다_황보름 작가 (by 아돌) [셸리북스 에세이픽 2] 그런 우리들이 있었다고_김혼비 작가 (by 아돌)

댓글 달기

댓글 0
에세이 PICK16

셸리북스 에세이

2022.12.01 조회 86 발행일 2022-11-30
2022.09.28 조회 51 발행일 2022-09-28
2022.09.21 조회 79 발행일 2022-09-21
2022.09.14 조회 76 발행일 2022-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