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PICK16

셸리북스 에세이

[셸리북스 에세이픽 2] 그런 우리들이 있었다고_김혼비 작가

발행일 2022-08-10

그런 우리들이 있었다고

 

김혼비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예보에 없던 비가 갑자기 쏟아져 하교시간까지 이어지면 우산을 들고 아이들을 마중 나온 엄마들로 복도며, 건물 현관 앞이며, 운동장이 붐비곤 했다. 딱 그 즈음이 ‘한강의 기적’이니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니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초스피드 산업화를 이루며 올림픽까지 치른 한국이, 환경오염에도 본격적으로 눈을 돌리던 시기였다(무려 환경보호콘서트 <내일은 늦으리>가 기획된 시대였다). ‘온실효과’ ‘오존층 파괴’ ‘스모그’ 같은 용어들이 온갖 곳에서 흘러나왔고, 그중에서도 ‘산성비’는 유독 불벼락, 귀싸대기, 슬픈 예감과 함께 절대 맞아서는 안 될 무서운 존재였다. 물론 산성비는 유해하지만, 그 당시 산성비에 관한 일설에는 다소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었다. 미래학자들의 경고를 듣다보면, 몇십 년 안에 건물이 부식되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고, 산성화된 강 위로 떼죽음을 당한 물고기가 둥둥 떠오른 사진을 보다보면, 몇 년 안에 수중생태계까지 완전히 파괴되는 ‘한강의 기절’을 이룰 것만 같았다. 용이, 심지어 아시아의 네 손가락에 꼽히는 용이 비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 이렇게 무서워하는데 일개 인간들의 두려움이야 말할 것도 없어서 아이들이 비를 맞을세라 엄마들은 학교로 부지런히 몰려들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하나둘씩 사라지면 아무도 마중 오지 않은 몇몇 아이들이 체에 걸러진 알갱이들처럼 현관 앞에 남겨졌다. ‘ㄷ’자로 생긴 학교 건물 각 변마다 현관이 하나씩 있어서 저 너머 현관에 드문드문 모여 있는 아이들도 잘 보였는데 늘 그 아이들이 그 아이들이었다. 나처럼 부모님이 맞벌이여서 집안에 데리러 올 어른이 남아있지 않은 아이도 있었고, 애초에 집안에 데리러 올만한 어른이 없는 아이도 있었다. 우리가 거기 모여 있던 이유는 산성비를 두려워해서는 아니었다(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은 그런 인식이 좀 부족했다). 엄마들이 대거 마중 올 정도의 비라면 꽤 거센 편이어서 좀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물론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기다림이 하염없어지면 성질이나 사정이 급한 아이 몇은 냅다 빗속으로 뛰어들었고, 그러면 나처럼 먼저 행동할 정도로 대범하지는 못하지만 성질은 급한 편인 아이들도 따라 뛰었다. 그렇게 비를 흠뻑 맞으며 뛰어다니면 괜히 신이 났고, 평소에는 금기시되는 어떤 것을 상황에 맞게, 필요에 의해, 내 의지대로 선택하는 융통성을 발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열 살도 안 된 나에게 그런 융통성은 ‘어른의 것’이었으므로 어른스러운 행동을 한 것에 조금 우쭐해졌다.

 

그런 종류의 우쭐함은 남겨진 다른 아이들 대부분도 갖고 있는 정서였다. 확실히 우리에게는 은근한 자부심 같은 게 있었다. 다들 어른으로부터 보호받는 상황에서 보호가 필요 없는 특별한 아이들이 된 느낌. 이까짓 비쯤은 얼마든지 혼자서도 부딪힐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은 느낌. 실제로 교실에서 볼 때는 안 그랬던 아이들도 엄마의 우산 아래 들어가면 갑자기 어린애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들의 안락을, 우리는 우리의 자율을 나눠가진 셈이었다. 사실 우리야말로 이따금 영락없이 어린애들이 되어 빗물이 고인 곳을 골라 밟으며 물놀이를 하고, 서로의 옷을 쥐고 비틀어 물을 짜내며 맥락도 없는 빨래놀이(근데 놀랍도록 재미있었다!)를 하며 한참 놀았으면서도, 우산 바깥의 세계에서 비를 피하지 않고 벌인 일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대단히 중요한 경험을 공유한 것 마냥 짐짓 어른 흉내를 내며 헤어지곤 했다. 혼자 남겨지는 때도 많았다. 대개 교실에서 늦장을 부렸거나 우리 반만 청소가 늦게 끝난 경우였는데, 그럴 때면 현관 옆 계단에 앉아 숙제를 하다가 잦아든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날은 더욱 특별했다. ‘함께’가 아닌, ‘혼자’ 그 상황을 잘 대처하고 심지어 즐겼다는 데에서 오는 감각은 좀 더 독립적인 방식으로 뿌듯했다.

 

그래서 나는 그 후로 여러 매체에서, 특히 만화나 텔레비전 단막극 같은 데에서 비가 오는데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아 당장 울 것 같은 얼굴로 잔뜩 풀이 죽은 아이가 나올 때마다 조금 의아했다. 게다가 그런 슬픈 설정은 대개 ‘일 하느라 바쁜 엄마’(드물게는 ‘아파서 거동하기 힘든 엄마’)와 짝을 지어 맥락을 이루곤 했기에 더 그랬다. 처음 몇 번은 ‘그래, 처한 상황과 성격은 다 다르니까 그런 아이도 분명히 있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넘기기에는 그런 설정이 잊을만하면 눈에 띌 정도로 자주 보였다. ‘그래, 그런 아이가 예상보다 많을 수도 있지’라고 또 넘기려고 보니, 속사정은 다 제각각이었을지라도 그런 상황을 즐겁게 맞곤 했던 내 어린 시절 동창들 같은 아이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왜 항상 당연하다는 듯 데리러 가지 못하는 주체로 ‘엄마’가 상정되는 거지? 마치 비오는 날 아이를 학교에 데리러 가야하는 건 오직 엄마들만의 몫이라는 듯. 남겨진 아이의 슬픔은 오직 엄마의 잘못이라는 듯.

 

한번은 예의 그런 장면이 연출되는 예능 프로그램을 같이 보다가 엄마가 나에게 사과한 적도 있었다. 평소 엄마에게 미안한 게 워낙 많은 나머지, 거꾸로 엄마가 나에게 미안해할 일이 생기면 조금이나마 나의 미안이 만회가 되는 것 같아 슬쩍 반기는 나로서도 그 사과만큼은 받을 수가 없었다. 어릴 적 그런 시간들이 모여 만들어진 나의 독립적인 성격의 일부가 훼손되는 것 같았다. 아니, 다 떠나서, 억울했다! 아닌데? 비 오는 날도, 아무도 오지 않았던 운동회도, 혼자면 혼자인 대로, 그런 아이들끼리 함께 할 때면 함께인 대로 다 즐거웠는데? 게다가 아빠는 뭐하고 엄마가 사과해? 엄마가 아빠보다 더 많이 일했고 더 바빴고 더 고생했는데. 그렇게 고생했는데.

 

그런 억울함과 의아함이 마음 한 켠에 계속 달라붙어있던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어쩌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친구들에게 당시의 심경을 물어보며 사례를 수집하기에 이르렀다. 비슷한 기질들끼리 저절로 모이기 마련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내 어릴 적 동창들과 비슷했거나, 아니면 그냥 별 생각이 없었다고(슬프거나 외롭지도 신나거나 뿌듯하지도 않았다고) 심상하게 회고하는 친구들이 훨씬 많았다. 비오는 날이라고 해서 엄마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딱히 더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는데 비에 흠뻑 젖은 모양새가 불쌍해보였는지 “저 어린 것을 남겨두고...”라며 혀를 차는 어른들이야말로 자신을 기어이 외롭게 만들었다고 분개하는 이들도 있었다(특히 C는 “‘어린 것을 남겨두고’라는 말, 망자 탓하는 말처럼 들려서 묘하게 기분 나쁘지 않냐?”라며 불을 뿜었다).

 

그러고 나니 더욱더 드라마 등에서, 챙김, 특히 ‘엄마의 챙김’을 받지 못해 쓸쓸하게‘만’ 그려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걸 보면서 엄마를 탓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걸 보고는 아이에게 미안해할 엄마들이 떠오를 때마다, 항변하고 싶었다. 전혀 쓸쓸하지 않았던 아이들 역시 많았다고. 우산 속 나의 자리도 아늑했겠지만 우산 밖 빈자리가 우쭐했던 아이들도 분명 있었다고. 그 빈자리를 스스로 채워가며 커간 아이들이 갖게 되는, 산성비도 부식시키지 못할 단단한 마음 같은 게 있다고. 설령 그렇지 않았던들 그건 엄마들만 미안할 일이 절대 아니라고. 당시에는 우리들 모두 너무 어려서 사회가 ‘엄마’에게 소급해서 씌우는 책임의 무게를 잘 몰랐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어른들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런 어른들이 미디어에 ‘나쁜 엄마들’을 만들어내고, 우리의 존재를 지워버렸다는 건 잘 몰랐다. 그래서 제대로 말하지 못했고 그래서 한번쯤 꼭 말하고 싶었다.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그 시절을 우리가 어떻게 통과했는지에 대해서. 그런 우리들도 있었다고. 분명 있었다고.

 

셸리의 말 : 비가 아니라 그 무엇이 오더라도 나를 위해 우산을 들고 나타날 누군가가 반드시 있다는 믿음이 어린 시절의 우리에게 있었소. 그가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한다고 해도 그의 마음이 이미 그 시절의 내 앞에 다다랐다는 것을 이제는 아는 것이오. 우리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잘 커왔고 이제는 누군가의 우산이 되어야 하오.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 8월이오. 당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우산이 필요할 것이오. 나 셸리는 같이 쓸 큰 우산 하나를 준비해 두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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