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PICK16

셸리북스 에세이

[셸리북스 에세이픽 13] 나는 전혀 망하지 않았다_이묵돌 작가

발행일 2022-11-09

내게는 망한 원고가 없다.

나중에 보니 놀라울 정도로 못 쓴 글들은 있지만, 쓰고 나서 ‘젠장, 망했다’같은 생각이 드는 글은 없었다. 내 자존감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서, 주제도 모르고 오만방자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무릇 실망하려면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나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쓰면 뭐 얼마나 대단한 글을 쓴다고 기대씩을 하나? 나는 그냥 완성이나 하면 다행이고, 그래서 원고료나 안 떼이고 잘 받으면 그걸로 알이즈웰이다. 뭐 내 이런 방식이 누군가에겐 천박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천박한 주제에 고상한 척이나 하는 것보단 이쪽이 조금이나마 낫다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내놓은 결과물을 보고 ‘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내 원래 실력대로라면 이 정도는 나와 줘야지’ 하는 생각이 아주 조금이나마 기저에 깔려있으니까, ‘내가 열심히 쓴 글이 겨우 이런 수준이라니!’ 하고 충격을 먹는 것이다. 가령, 집에서 가끔 라면이나 끓여먹는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의 요리에서 5성급 호텔 수준의 풍미를 기대한다면, 정말이지 양심이 없는 걸 넘어서 그 자체로 웃긴 일 아닐까. 하물며 나는 라면조차 잘 끓였을 때와 못 끓였을 때의 차이가 현저한 인간인데.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가 “네까짓 놈이 뭘 할 수 있겠냐”였다. 딴에는 정신 좀 차리라고 하신 말씀이었겠지만, 듣는 자식 입장에선 상처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내가 뭐든지 잘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기본으로 깔고 살았다. 누군가에게 앞서 나가기는커녕,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중간만 하자는 주의였다. 그 중간이라는 것조차 엔간히 노력하지 않으면 다다를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뭐 그렇다고 정신을 차려서 아주 열심히 살았다, 는 건 정말 헛소리다. 하지만 무엇이든 평균쯤은 해보잡시고 시도는 많이 했다. 나야 어떤 분야에서든 천재는 못 될 테니까. 일단 적당히 할 줄 아는 정도로만 익혀두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든 운동이든 특출나진 않아도 그럭저럭 봐줄만한 만큼은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기대 비슷한 걸 하게 된 것이 바로 야구였다. 사실 야구도 전부는 아니고 공 던지는 것만 잘했다. 나는―지금에야 좀 나아졌지만― 학창시절만 해도 턱걸이 한 개, 팔굽혀펴기 하나도 제대로 못 할 만큼 비리비리한 신체조건을 갖고 있었다. 팔씨름을 해서 이긴 적이 거의 없었고, 청소시간 책상도 제대로 못 들어서 선생님께 야단을 맞기도 했으니 평균을 밑돌아도 한참을 밑도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공만큼은 잘 던졌다. 따로 배운 적도 없는데 처음부터 꽤 괜찮게 던지는 편이었고, 요령을 좀 알고 나니까 금방금방 속도가 붙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빠르게 던지는 것과 정확하게 던지는 것은 좀 다른 차원의 문제지만…… 가끔 친구들과 캐치볼이나 하던 게 전부였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시속 110km의 공을 뿌릴 수 있었다는 건 내 유일한 자랑거리이자 자부심이었다. 사회인야구를 몇 년씩 하고도 100km가 채 안 나오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정말이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정식으로 교육을 받았다면, 중고교 야구부에 들어갈 만큼의 가정형편만 됐다면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기야 착각은 자유니까.

그렇게 대학생이 돼서 처음으로 야구 동아리에 들어갔다. 거기서도 공이 나보다 빠른 사람이 없었다. 워낙 영세한 동아리라 선수층도 얇았고, 신입생에게 기회도 주자는 의견이 나오면서 첫 경기부터 선발투수를 맡았다. 나는 뭐, 솔직히 말해 당연한 결정이라 생각했다. 내가 투수를 하지 않으면 누가 투수를 한단 말인가. 당시의 내 걱정이라곤 밤늦게까지 알바 뛰느라 경기 당일에 늦잠을 자진 않을까, 첫 경기부터 완봉이나 노히터를 기록해서 회장 형이 졸도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정말.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데서 내세울 것이 너무 없던 나머지 인간이 홱 돌아버린 건 아니었나 싶다.

결국 나는 첫 경기부터 엉망진창으로 깨지고 패전투수가 됐다. 비록 연습경기이기는 했지만, 볼넷이며 실점을 몇 개나 내줬는지 2회쯤 돼서는 헤아리는 것도 포기했다. 심지어 한두 개는 타자를 맞추기까지 했다. 마운드에서 몇 번이고 모자를 벗어 사과했다. 이렇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손발이 바들바들 떨리는가 하면, 투구동작도 제대로 못해 보크까지 저질렀다. 회장 형은 나를 조기강판 시키면서, 처음이니까 어쩔 수 없고 잘했어, 하며 졸업반이었던 선배를 구원투수로 올렸다. 선배는 100km도 안 되는 공으로 남은 아웃카운트를 실점 없이 전부 막아냈다. 실로 잔혹한 데뷔전이었다. 비단 야구뿐 아니라 첫발을 내디딘 사회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래, 그래서 너한테 무슨 재능이 있다고? 네까짓 놈이 뭘 할 수 있는데?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글로 밥을 벌어먹게 되면서 두세 번쯤 글쓰기 강연 같은 걸 나간 적이 있다. 내가 뭐 쓰면 얼마나 잘 쓴다고, 나 따위가 남을 가르칠 입장이 되나 했었는데…… 막상 가보니 세상에는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머릿속에 생각은 많은데, 정작 자리에 앉으면 뭘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하나도 안 잡힌다는 것이다. 난 이 비슷한 얘기를 몇 번이고 들으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보기에 그럴듯한 단어나 얼개를 짜는 테크닉 같은 게 아니라는 확신이 섰다.

살다보면 누구나 조금씩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어떤 실수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 사소한 한편,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서 영영 되돌릴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실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크고 작은 실수들을 다 끌어안고 걸어가야 한다. 한번 뱉은 말, 저지른 행동, 흘러간 시간은 절대로 되돌아오지 않으며,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가만 보면 글쓰기도 비슷하게 생겨먹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인생과 달리 글은 나중에 지우고 고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건 단점이기도 하고 장점이기도 한데, 적어도 망한 원고가 될까봐 끝까지 쓰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내게 있어서 망한 원고란 완성해보니 수준이 낮고 너무 못 쓴 글이 아니라, 그렇게 될까봐 무서워서 시작도 완성도 못한 생각들이다. 잘 되든 못 되든 일단 던져야 한다. 게임은 투수가 공을 던질 때 비로소 시작되므로.

 

 

오래 전 헤밍웨이가 피츠제럴드에게 말했다. “소설을 쓰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어. 그 빌어먹을 결말까지 쉬지 않고 곧장 써 내려가는 거지……”

내겐 원고도 마찬가지다. 크고 작은 결함은 내 힘으로 어쩔 수가 없다. 결국엔 끝까지 던지는 것만이 망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오늘 져도 내일 도전할 수 있다면 패배한 것이 아니다. 누구 말마따나 인간은 패배하도록 태어나지 않았고, 나는 전혀 망하지 않았다. 못 썼을지언정 계속

쓰고 있으니까. 바로 지금, 지금 이 순간까지도.

사족이지만, 나는 그 뒤로도 쭉 야구를 계속하고 있다. 포지션은 여전히 투수인데, 전처럼 구속만 믿고 아득바득 안간힘을 써서 던지진 않는다. 가급적이면 힘을 빼고 적당히, 등 뒤에 있는 야수들을 믿고 정확하게 던지는 데 초점을 맞춘다. 얼마 전에 있었던 경기에선, 포수로 내 공을 끝까지 받았던 친구가 “야, 너는 좋은 투수야”하고 말해왔다. 확실히 난 그날 괜찮게 던졌다. 볼넷도 주고, 실점도 했지만, 결국엔 이겼다. 승리투수였다.

 

😺 셸리의 말 : 전혀, 망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묵돌 작가의 말이 오늘 왠지 눈물겨워서 오늘의 에세이로 픽했소. 모두 힘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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