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PICK16

셸리북스 에세이

[셸리북스 에세이픽 14] 그 찬란했던 파리의 새벽 6시_홍세화 작가

발행일 2022-11-16

 

그 찬란했던 파리의 새벽 6시

 

 

“왱 카페, 실 부 플레!(카페 한 잔 주세요!)”


파리 카페(커피 집)에서 카페(커피)는 에스프레소야. 에스프레소 잔이 앙증맞지. 세 모금이나 네 모금쯤 될까.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 잔은 아래쪽이 갈쭉해 세 모금도 채 안 돼. 그러니 에스프레소는 진해야겠지. 

 

밤새워 문 여는 카페, 손님은 나 말고는 한쪽 구석에 나란히 앉아있는 연인뿐이었어. 일요일 새벽, 카르티에 라탱(대학가)에서 토요일 밤을 진하게 보낸 청춘여남들이 모두 잠에 떨어졌을 시간인데, 저 두 연인은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한 걸까.

 

설탕을 넣어도 카페는 섭씨 55도를 유지할까? 그러면서 난 설탕 세 개를 넣어. 달달하고 진한 에스프레소 한 모금이 목젖을 뜨겁게 적시며 밤 새워 12시간 일한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지.  

 

‘6월의 밤’을 택시 핸들을 잡고 지새웠어. 그래, ‘6월의 밤’이라는 알프레드 드 뮈쎄의 시편이 있었지. 서울의 젊은 시절, 멋모르고 그 시들을 찾아 읽었던 건 시보다 조르주 상드의 사랑을 누가 차지할지 쇼팽과 경쟁했던 시인의 사연에 끌렸기 때문이었어. 이젠 그 시편의 한 구절도 기억나지 않아. 대신 언제부턴가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은 남의 나라...”, 이 구절만 일상의 후렴구처럼 되뇌고 있어. 비가 내려도 비가 내리지 않아도.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데, 그때는 불안이 나를 잠식했지.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난민의 삶이 그런 거잖아. 

 

“셰 뚜아, 우 셰 무아?(네 집, 아니면 내 집?)”
 

새벽 4시 40분쯤 마지막으로 태운 손님이 남긴 말이 귀에 남아 있어. 파리 연인들은 종종 내 택시 뒷자리에서 이 질문을 던지곤 해. 나에게 행선지를 말해야 하니까. 택시에 오르기 전까지 둘의 마지막 향연을 벌일 장소를 정하지 못했을 만큼 꽉 찬 토요일 밤을 보냈나봐. 그래, 그들이 누리는 자유는 모텔이나 여관을 필요 없게 만든 그런 자유이기도 해.

 

그런 자유를 단 한 순간이라도 느껴보았던가. 자주는 아니어서 다행인데, 난 파리에서도 두 가지 악몽에 시달렸어. 하나는 34개월 만기 제대했는데 서류가 잘못돼서 또 입대해야 한다는 내용이고, 또 하나는 정보수사관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내용이야. 앞의 악몽은 그래도 조금 더 이어지는 편인데, 뒤의 것에는 꿈속에서도 소스라치게 놀라 깨고 말아. 진땀에 쩐 몸으로 심호흡을 해야 해.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고문의 공포가 없는 것, 그것이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알 수 없는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야. 이젠 조금 더 나아가 택시 뒷좌석에서 “네 집, 아니면 내 집?”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네.

 

에구! 딴 생각하다 자칫 빨간 신호등 하나를 놓칠 뻔했어. 나는 도리질을 쳤지. 두 손님을 “셰 투아(네 집)”인 파리 12구에 내려주고 센 강변도로를 타고 이 카페로 온 참이야. 파리 서쪽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 때에도 센 강변도로를 타면 금세 갈 수 있기도 해. 
 

*

  
파리의 임차택시기사는 거의 모두 야간에 일해. 개인택시기사가 주로 낮에 일하는 건 사람의 생활 리듬에 맞춰 일해도 될 만큼 여유가 있어서야. 임차택시기사는 개인택시들이 많이 일하는 주간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도, 또 할증료가 붙기 때문에도 야간에 일해야 해. 그래야 택시임대료 지불하고 자기 몫을 챙길 수 있어. 주 단위로 빌리는 택시임대료를 벌려면 보통 4일 걸려. 나머지 3일 동안 번 게 자기 몫이 되는 거지.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 쉬면 수입의 1/7이 아니라 1/3이 사라져. 그러니 일주일에 하루 쉬기도 어려워. 한 번은 몸이 아파 사흘을 쉬었는데, 몸 아픈 것보다 그 전 4일 동안 일한 게 말짱 꽝이 된 게 더 아프더라고. 자본 없는 이방인이 남의 땅에서 먹고사는 게 어찌 쉬울까마는, 그래도 한국의 회사택시기사들보다는 낫겠지. 
  

*

 
어제 토요일 오후 5시에 일을 시작했어. 규정상 임차택시기사는 하루에 10시간 일하게 돼 있어. 택시기사들의 과로를 막기 위한 규정이지. 오후 5시에 일을 시작하면 새벽 3시에 끝내야 하는데 난 중간에 식사시간을 빼앗기는 게 아까워 10시간을 다섯 시간씩 둘로 나누었어. 오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다섯 시간 일한 뒤, 두 시간 쉬고 다시 12시부터 새벽 5시까지 일한다고 택시 뒷좌석 뒤에 달려 있는 날짜시각표에 기록했던 거야. 중간에 두 시간 쉰다고 했지만 결국 12시간을 거의 채우게 돼.

 

폴 라파르그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책에서 하루 세 시간만 일해도 된다고 했지. 그가 그렇게 쓴지 백여 년이 지났는데 12시간 일하고 있는 거야. 일주일에 하루 쉬는 것도 힘든데 말이야. 그러면 고단한 몸을 눕히려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왜 카페를 찾아왔냐고? 아이, 그걸 몰라? 몸도 피곤하지만 그보다 지친 영혼이 더 피폐하지 않게끔 위무해야 하잖아. 이방인들에게 파리의 카페와 에스프레소 한 잔의 의미는 그런 게 아닐까 싶어. 내가 귀가 시간을 늦춘 이유가 또 하나 있어. 깨어 있는 식구를 보기 위해서야. 바로 집에 가면 모두 잠들어 있는 시간이니까. 
 

*


시계를 보니 5시 40분이었어. 동은 오래 전에 텄고 태양도 이미 떴지. 파리는 위도가 북만주와 같아서 꽤 높아. 6월의 밤은 아주 짧지. 난 몸을 서서히 일으켜 쌩미셸 광장 택시정류장에 주차해 둔 나의 임차택시로 발걸음을 옮겼어.

 

반쪽 센 강 건너편으로 노트르담 대성당 전면의 두 기둥이 보였지. 근데 대성당 앞 광장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야. 여느 때면 여행객들로 바글거리는 곳인데 말이야. 오가는 자동차도 없었어. 파리에 나 혼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니까. 하기야 프랑스인들 중 야행성이 아닌 사람 드물고, 여행객들도 즐거운 토요일을 만끽했을 테니 일요일 새벽에 누가 거리에 나오겠어.
 

난 택시에 올라 달렸어. 바스티유 광장으로, 바스티유 광장에서 리볼리 길을 따라 루브르궁을 거쳐 콩코르드 광장으로 달렸어. 그리고 샹젤리제 대로를 마구 달렸어. 보통 때는 사람들로 붐비는 광장이고 거리인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 거야. 오가는 자동차도 거의 없는 거야. 마치 과거의 흔적만 남아있는 적막의 도시 같았어. 비스듬한 햇살 아래 그 오만하면서도 예쁜 자태를 완연히 드러낸 파리가 나의 독무대가 된 거야.

 

개선문 광장을 돌 때쯤이었나, 나도 모르게 노래를 부르고 있더라고. 가요도 부르고 운동권 노래도 불렀는데 한 구절씩 부르곤 끝내지 않고 다른 노래를 불러댔어. 개선문 광장에서 알마 다리로 달린 뒤 에펠탑에 다가갈 즈음이었나, 난 마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 택시 안에서 혼자 아우성을 쳤지. 택시 바깥으로 들리지도 않겠지만 어차피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그래서였을까, 욕도 해댔어. 이 개자식들아― 이 나쁜 놈들아― 그랬는데 잠시 뒤부터였어. 눈물이 나오더라고. 소리 없이 펑펑 눈물이 나오더라고. 연신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난 달리고 또 달렸어.

 

그 찬란했던 파리의 거리를, 아침 여섯 시 조금 전부터 조금 뒤까지 그렇게 마냥 달렸어.

 

 

작가의 말 :

 

코로나가 잠잠해진 뒤에나 가능하겠지요. 파리를 여행할 분들에게 팁을 드리겠습니다. 일 년 중 가장 좋은 때는 태양이 일찍 떠오르는 하지(夏至) 가까운 6월 하순이나 7월초입니다. 우선 낮이 길어서 좋습니다. 그런데 일요일 새벽에는 절대로 잠들지 마세요. 여정상 일요일이 어려우면 토요일 새벽도 괜찮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노트르담 대성당까진 택시를 이용하세요. 저의 옛 동료가 무척 반가워할 겁니다. 손님이 없을 때니까요. 그 다음부터는 걸어 다니세요. 센강을 따라 걷는 것도 좋습니다. 5시30분쯤 예술의 다리(Pont des arts)를 걸으면 딱 좋을 겁니다. 동쪽으로는 노트르담 대성당과 함께 둘로 갈라진 센강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퐁뇌프(Pont neuf)가 보일 것입니다. 태양은 이미 떴는데 사람도 자동차도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외로운 산책자가 되어 파리의 새벽을 만끽하세요.

 

셸리의 말 : 홍세화 작가와는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으나 이 에세이 메일링 서비스캣 셸리를 통해 다시 만났소. 내 앞의 그는 술잔을 들며 오랜만에 경쾌하게 글을 써 보겠다고 했고, 그가 누구보다도 그에 부합하는 글들을 보내왔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소. 오늘, 홍세화 작가의 낭만이 문득 떠오르는 가을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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