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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리북스 에세이

[셸리북스 에세이픽 7] 미래로의 회귀_김선오 작가

발행일 2022-09-14

 

미래로의 회귀 / 김선오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은 세 살 무렵 친척의 거실에서 처음으로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알았다고 한다. “여기가 내 세계구나……”

 

세 살의 번스타인을 상상한다. 건반을 누르는 짧은 검지손가락을, 힘주어 누르는 바람에 잠시 희어진 손끝을, 의자에 앉으면 바닥에 닿지 않아 허공에 떠 있는 작은 발들을 상상한다. 박자에 맞추어 흔들리는 세 살 아이의 두 발을.

아이의 다리는 그곳에서 점점 자라날 것이다. 어느 순간 페달에 닿은 오른발은 두 손이 연주하는 여러 음을 무리 없이 연결해낼 것이다. 길어진 손가락은 점점 더 많은 건반 위를 여행하듯 자유롭게 오갈 것이다. 이러한 반복이 그의 세계를 구성할 것이다.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가 공룡이 되고 싶어 하고 경찰차를 좋아하는 아이가 경찰차가 되고 싶어 하듯 어린 번스타인은 피아노가 되고 싶었을까. 어느 날 피아노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었을까. 아이들은 자라며 공룡과 작별하고 경찰차와 작별한다. 번스타인은 아흔이 넘어서도 피아노와 작별하지 않았다. 피아노는 정말 그의 세계였던 셈이다.

 

이제 열일곱 살의 나를 상상한다. 나는 기억력이 나쁜 편이다. 과거를 불러오기 위해 상상을 동원해야 한다.

그때의 나에게 삶은 한없이 가혹하고 버거운 것이었다. 죽음을 떠올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얼마나 괴로웠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다. 학창 시절은 머릿속에서 조금 블랙아웃 되어 있다. 아마 성인이 된 나의 뇌가 일부러 지워 버렸을 것이다.

더 멋진 반항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열일곱의 나는 학교를 조퇴하고 구립 도서관에 갔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서가를 돌아다니다 당시 유행하던 ‘미래파’ 시인의 시집 한 권을 우연히 꺼내 든다. 수록된 첫 번째 시를 읽는다. 전율한다. 두 번째 시를 읽는다. 다시 전율한다. 도서관의 큰 창으로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무언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내가 읽은 시집이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이었다는 사실도, 그가 지금은 납득하기 어려운 용어로 여겨지는 소위 ‘미래파’의 대표 주자였다는 사실도 몰랐지만, 아니 미래파가 무엇인지 현대시는 또 무엇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 순간 나는 다른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 전율의 기억을 죽기 전까지 잊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 그날 저녁 집에 돌아가 펜을 들고 시인지 뭔지 그 비슷한 글을 쓰려고 시도해볼 것이라는 예감, 언젠가 나의 시집 역시 이 도서관 책장 한구석에 꽂혀 있으리라는 예감, 그러니까…… “여기가 내 세계구나” 하는 예감이었다.

 

아이는 건반에 손을 올리자마자 자신의 미래를 보았을 것이다. 피아노와 최초로 접촉했던 순간이 한 사람을 피아니스트로 만들었다면, 그리고 그 순간에 아이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면, 자신을 덮친 갑작스러운 매혹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음을 확신했다면, 미래를 본 일과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첫 시집이 출간되고 한동안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다. 나의 시의 부족함에 대한 부끄러움, 내가 적은 활자들이 책이라는 형식을 통해 권위를 얻었다는 사실에 대한 간지러움, 표지에 내 이름이 적힌 시집이라는 낯선 대상에 대한 어색함 탓도 있었지만, 앞으로 평생의 많은 시간을 백지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보내게 되리라는 예감이, 처음 내 손으로 시집을 꺼내 들었던 그 순간보다 훨씬 무겁게, 동시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두근거리는 감각으로 나를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출간 후 꽤 오랜 시간을 이 강력한 압도감에 시달려야 했다. 내 손으로 첫 시집을 펼쳤던 순간은 압도감을 극복했을 때가 아니라, 그러한 예감에 고요히 순응할 수 있을 만한 용기가 생긴 순간이었다. 이제 나는 종이 앞에서 여전히 끙끙대며 시를 쓰는 노인이 된 나를 어렵지 않게 떠올린다.

 

나는 다시 상상한다. 구립 도서관 책장 어딘가 꽂혀 있을 나의 첫 시집을. 그리고 미래의 어느 날 우연히 그 책을 꺼내 드는 앳된 얼굴의 누군가를. 운이 좋다면 그날 밤 그가 떨리는 손으로 써 내려갈 첫 번째 시를.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의 이름으로 출간될 시집을. 그의 첫 시집이 같은 도서관 책장에 꽂혀 있는 모습을. 그리고 또 다른 앳된 얼굴의 누군가가 서가를 걷다가……

 

내가 보았던 미래는 어쩌면 더욱 먼 곳의 일인지도 모른다.

 

 

😺 셸리의 말 : 번스타인의 피아노위 오선지 같은, 김선오 시인의 원고지 같은, 그런 당신의 세계가 반드시 있을 것이오. 모든 것을 펼쳐낼 수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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