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PICK16

셸리북스 에세이

[셸리북스 에세이픽 1] 너와 우산이 쓰고 싶었어_김민섭 작가

발행일 2022-08-03

<너와 우산이 쓰고 싶었어>

 

나는 비를 싫어한다. 내가 만났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비가 오는 날에는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해 두었다. 물론 그렇게 정 없게 말했던 것은 아니고, 내가 얼마나 비를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하고는 실내데이트를 하자, 미안하니까 데이트 비용은 내가 다 내겠다, 하는 대안을 제시했다. 이쯤되면 정말로 비를 싫어하는 것이다. 가끔은 “고작 비가 싫어서 밖에서 안 만날 만큼 나를 안 사랑해?” 하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그러면 나는 나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싫어하면 그에 맞춰주는 게 사랑 아닌가. 장마철을 제외하고 나면 비가 오는 날이 얼마나 된다고. 겨울에는 비도 안 오고 말야. 흥, 이런 말갈족 같은...’ 하는 심정이 되었다.

 

비를 싫어하는 데 어떤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우산을 잘못 쓰는 건지 조금의 비에도 신발의 앞코가 다 젖곤 한다.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빗물이 스며들어 양말을 적시고, 그 미끈거리는 질감이 발가락과 앞꿈치에서 느껴질 때면, 나는 그만 모든 걸 내려놓고 어서 집에 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아, 집에 가도 발에서 냄새 나겠지, 그리고 저 신발은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앞으로 계속 냄새가 나겠지, 아 망했다, 하는 데까지 이르고 나면, 거기에서 그 날의 일상이 지속되거나 어떤 사랑의 언어가 피어오를 리가 없다. 

 

한 번은 왜 나의 신발만 젖는 건가 하고 관찰해 보기도 했다. 우산을 쓰는 데 무슨 자격증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남들은 나보다 작은 5단식 접이우산을 쓰고도 덜 젖으며 잘만 걷는다. 그러나 나는 가랑비만 와도 곧 신발의 앞코가 축축해지고, 걸을 때마다 튀어 오른 물이 정강이와 무릎까지를 적시고 만다. 아무래도 나의 걷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 다리가 길지도 않은 사람이 보폭은 넓고 바닥을 치면서 걸으니까 결국 젖고 물이 튀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러나 수 년째 유지해 온 걷는 방식을 바꾸기도 어렵고 굳이 비 오는 날 안 나가면 되는 것이어서, 나는 계속 비를 싫어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비를 싫어한다기보다는, 내가 맞아야 하는 비를 싫어할 뿐이다. 제습기를 틀어 둔 집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호록호록 마시면서 뽀송뽀송한 몸과 마음으로 비 오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역시 비 오는 날이 참 좋아, 운치도 있고 말이야.’ 하는 여유로운 마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출퇴근 시간에 장대비를 맞으며 광역버스 줄을 길게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면, 버스나 지하철에 올라 우산을 접었는데 물은 줄줄 떨어지고 의자는 축축하고 옆 사람도 축축한데 신발에 물은 들어가서 미끈거리고 비 와서 차가 막히니까 그 안에서 더운 에어컨 바람에 속까지 한참 울렁거리고, 그러면 그 순간 누구라도 “저도 비를 제일 싫어합니다요.” 하고 실토하게 될 것이다.

 

이전에 페이스북에서 본 유난히 기억에 남은 글도 ‘비’에 대한 것이었다. 한강이 보이는 브랜드 아파트에 산다는 그는 장마철에도 비를 한 방울도 맞지 않는다고 했다.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약 30분쯤 올림픽대로를 타고 직장에 출근해서 역시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회사 안의 복합상가에서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모든 것을 해결하다가 다시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퇴근해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자신의 집으로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밖에서 100년만의 호우경보가 발효되어 나 같은 사람들이 엉엉, 하고 젖은 발로 돌아다니고 있든 어떠하든 별로 상관이 없다. ‘젖지 않는 것’, 결국 그게 부의 상징이 아닌가 싶어서, 나는 그가 몹시 부러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누군가의 부가 부러워진 게 아주 오랜만이었다. 당연하지만 글은 비를 막아주지 못한다.

 

비는 공평하게 내리지만, 그 비가 더욱 적시는 것은 결국 평범함이거나 가난이다. 지하주차장이 있는 브랜드아파트에 사는 사람과 비가 새는 작은 방에서 새우잠을 자는 사람이 맞는 비의 총량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대리운전을 하던 때 쏟아지던 비가 참 원망스러웠다. 장대비가 오니까 콜을 잡기도 어렵고, 손님에게 가는 데도 오래 걸리고, 젖은 몸으로 차에 타려니 미안하고, 정말 최악이었던 것이다. 푹 젖어서 집에 돌아가면서 다시는 비 오는 날 일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다만 그날 번 돈이 다른 날보다 조금은 많았던 것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그날 새벽의 대리기사들의 몸과 마음이 대개 비슷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비를 싫어할 예정이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내가 혹시라도 복권에 당첨되거나 내 책이 밀리언셀러가 되어 한강이 보이는 브랜드아파트에 살게 된다고 해도, 비가 올 때 질척이던 모든 것들이 떠오르면서 곧 슬퍼질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비가 오는 날엔 방에서 귤이나 까먹다가 배가 고파지면 라면을 끓여서 신김치와 함께 먹으면서 철 지난 무한도전이나 보려고 한다. 비.오.는.날.만.

 

그래도 나도 언젠가, 비가 오는 날이어서 좋았던 작은 추억이 있다. 너무 비가 싫다는 말만 궁색하게 늘어놓은 것이 민망해 짧게 언급하며 끝내고 싶다.

나의 첫사랑은 고등학생 때 만난 Y다. 그 이전에 사귄 D도 있었지만 그때는 ‘나 정말 태어나길 잘했어, 너를 만났잖아.’라든가 ‘네가 보고 싶어서 숨을 못 쉬겠어, 빨리 보고 싶다.’라는 감정은 없었다. 둘 다 실제로 Y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터넷의 문학 플랫폼에서 만났다. Y는 판타지소설을 썼고 나는 에세이를 가장한 유머를 썼다. 정모에서 만나 서로 동갑인 것을 알았고 그때부터 채팅을 하거나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Y가 보고 싶었다. 너무나 보고 싶어서 1부터 100까지 세면 괜찮겠지 하고 그렇게 했는데도 더 보고 싶어졌다. 아마 Y도 그랬던 것 같다. 다음 날 우리는 혜화동의 민들레영토에서 만나서 3시간 넘게 앉아 있었다. 정말이지 앉아만 있었고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는데도 좋았다. 바깥으로 나오자 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그때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가방에 작은 우산을 넣어온 참이었는데 그것을 꺼내려다가 Y도 우산을 가져온 것을 알았다. 나는 문득 “어, 나 우산 안 가져왔는데...” 하고 말했고, 그래서 같이 우산을 쓰게 되었다. 성북동인 Y의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감사합니다, 비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앞으로 비를 좋아하겠습니다.’ 하고, 영화에서 본 것처럼 나의 한쪽 어깨를 적셔가면서 걸었다. 맞닿은 옷깃에서는 처음 느껴보는 기분 좋은 전기가 흘렀다. 그렇게 Y의 집 앞까지 가서 즐거웠노라고 말하고는 가방에서 나의 우산을 꺼내 보였다. Y가 왜 그랬느냐고 해서 나는 “너와 같이 우산이 쓰고 싶었어.” 하고 말했다. 다음 날, 우리는 다시 민들레영토에서 만났고, 내 첫사랑이 그렇게 시작됐다.

 

비가 오면, Y와의 기억보다는, 우산을 숨기던 고등학생 김민섭의 모습이 종종 떠오른다. 언젠가의 김민섭은 그렇게 누군가를 사랑했다. 누군가에게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어깨를 적시며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누군가에게, 비가 오는 날, “제가 오늘 우산을 안 가져왔네요.”하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비가 오는 날이면 집에 있을 테니까 그럴 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 작가의 말 : 이 글을 쓴 지도 2년이 조금 넘게 지났습니다. ‘에세이 메일링캣 셸리’ 1기 연재 때 '언젠가 비'라는 주제로 쓴 글입니다. 저는 몇 년 동안 쓴 글 중 이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어느 한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됩니다. 구독자들께도 그런 마음이 가서 닿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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