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PICK16

셸리북스 에세이

[셸리북스 에세이픽 5] 21살, 뉴욕의 지하철_핫펠트 작가

발행일 2022-08-31

21살, 뉴욕의 지하철

 

2009년, 21살의 나는 뉴욕에 살게 되었다. 대부분의 시간 나는 혼자였고(물론 멤버들이 있었지만 정해진 스케줄 외의 시간은 각자 보냈다) 어딜 가나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크게 뜬 채로 대화를 나눠야 했으며 세상은 지독히 낯선 것들로 가득했다. 혼자 돌아다니는 영어를 잘 못 하는 동양인 여자인 내게 캣콜링은 일상다반사였고, 때때로 외국어학원에선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으며 각종 희한한 사람들의 타겟이 되고는 했다. 대낮에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으니 다가와서 자기가 돈이 많다는 소리를 늘어놓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금발로 염색을 하고 돌아다니니 너의 뿌리를 존중하라며 고함을 지르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그들의 의도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15초 정도의 딜레이가 걸리는 내 영어 실력에 내 의도를 제대로 담은 말로 맞받아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저 웃어주다가 황급히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사람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긴 건 그 무렵이다. 상대방의 말이 어디로 향하는지 끝나기 전에 알아야 했다. 모르는 단어와 처음 듣는 표현 앞에서 마냥 웃어주고 동의했다간 바보가 되기 십상이었다. 눈빛, 손짓, 입꼬리부터 몸의 방향과 목소리의 높낮이까지 주어지는 모든 정보를 분석한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이 그 언어를 잘 모를 때 더 많은 정보를 준다. 반은 의도이고 반은 무의식이다. 저 사람이 알아들을 리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시 뉴욕의 지하철은 인터넷이 터지지 않았고 전화나 문자도 잘 안됐다(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혼자 브로드웨이 댄스 센터로 레슨을 받으러 갈 때나 타임스퀘어의 교회에 갈 때 할 수 있는건 이어폰을 귀에 꼽고 앉아 같은 칸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 뿐이었다. 사실 꽤나 재밌었던 게,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 - 말 그대로 세계 각양 각지의 사람들이 지하철 단 한 칸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북유럽의 어딘가에서 온 듯한 가족들은 하얗고 상기된 볼에 패딩을 입고(시절이 한여름인 경우도 많았다) 라이온 킹이나 위키드의 팜플렛을 읽곤 했다. 힙해 보이는 흑인 커플은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뒤에서 껴안은 채 속삭이거나, 여기저기 키스를 하곤 했다. 그 외의 수많은 뉴요커들 - 책 또는 신문을 읽는 사람, 나처럼 음악을 듣는 사람,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사람. 생김새부터 옷차림까지 전혀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며 저 사람의 직업은 뭘지, 저 사람의 고향은 어디일지, 저 사람은 어디에서 내릴지를 상상하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쉬는 날엔 가끔씩 목적지가 없이 지하철을 탔다. 한참 ‘가십걸’이라는 미드에 빠져 있을 때였다. 딱히 갈 일도 없었지만 어퍼 이스트 사이드라는 동네가 궁금했다. 지도를 보고 무작정 어퍼 이스트 사이드로 올라가는 지하철을 탔다. 51가 즈음을 지나자 토리 버치 슈즈를 신은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이 탔다. 중고등학생 쯤으로 보였는데 하나같이 말랐고 핸드폰은 블랙베리였다. 뉴욕에 유행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어딘가 시크하면서 부내나는 그녀들은 말 그대로 가십걸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고, 마침 갈 곳 없던 나는 그녀들이 내리는 곳에서 적당히 따라 내렸다. 북적이는 타임스퀘어와는 전혀 다른 한적한 동네였다. 정처 없이 걷다가 옷가게가 하나 있어 들어갔다. 지하철 안에서 본 것 같은 소녀(옷차림과 생김새 탓이다)와 엄마가 쇼핑 중이었다. 나도 기분 전환이나 할 겸 옷 좀 골라볼까 하는데 가격표를 보니 내가 살 수 없는 옷이었다. 디자이너 브랜드 편집샵이었던 것이다. 하하하. 여긴 어퍼이스트 사이드였다.

 

정처 없는 지하철 여행에 매력을 느낀 나는 짜릿한 모험(?)을 계획했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는데 저녁엔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기로 했고, 다들 그때까지는 내 선물을 사러 돌아다닌다고 했다. 할 일이 없어진 나는 금단의 구역 - 브루클린에 혼자 입성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회사에서는 절대로 브루클린은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실제로 그쪽 동네에서 탈을 당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겐 예술가들의 동네, 걸출한 아티스트들을 배출한 성지였고 멤버들을 데려갔다가 탈이 나느니 혼자 조용히 구경해보고 싶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메인 길은 완전히 번화가였고,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윌리엄스버그. 그래. 여기 가서 스윽 둘러보고 오지 뭐. 그렇게 나는 부푼 꿈을 안고 지하철에 올랐다.

 

맨하탄을 벗어나자 다양했던 인종은 확연히 줄었다. 타고 있던 지하철 안에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 아마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는 나 혼자였던 게 맞을 것이다. 어쩐지 조금 긴장되고 떨렸다. 역에서 나와 둘러본 거리는 신기했다. 직접 만든 악세사리와 빈티지 옷가게들을 둘러보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떤 가게에 가야겠다거나 어느 음식점을 가야겠다는 생각 없이 왔으므로 발 닿는 대로 걸었다. 들뜬 마음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나는 길을 잃었다.

 

번화가가 나올 줄 알았지만 어느샌가 나는 끝없는 주택가에 들어서 있었고, 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한 블럭에 한 명이 지나갈까 말까 했다. 길눈도 어둡고 지도도 잘 볼 줄 모르며 시력 자체도 좋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대충 걷다가 지하철역이 나오길 기대하는 것이었는데, 여긴 브루클린이었다. 몇 블록만 걸으면 지하철역이 뿅 하고 나타나는 맨하탄과는 달랐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고 핸드폰은 먹통이 됐다. 때마침 지나가는 남자는 “hey beautiful~” 하고 끈적한 미소와 함께 윙크를 날렸다. 덜컥 겁이 났다. 지금 당장 저 남자가 나를 끌고 가도 나를 구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왔다. 나 오늘 생일인데. 여기서 잘못되면 안되는데. 집에 어떻게 가지. 그러게 왜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그때였다. 태어나서 본 중에 가장 허름한 - 굉장히 클래식한 차가 내 옆으로 섰다. 창문 너머로 한 여자가 말했다. “are you lost?” 나는 얼른 대답했다. “yes..!” 그녀는 다시 물었다. “do you need help?” 그녀는 아마 내가 영어를 못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건 반쯤 맞다. “yes…!” 또 얼른 대답했다. 어딜 찾냐고 그녀가 물었다. 윌리엄스버그라고 답했다. 그녀가 차에 타라고 말했다. 저 여자를 믿어도 될지 알 수 없으나 여기서 밤을 맞이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녀는 3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차 안 여기저기에는 비슷한 가톨릭계를 상징하는 스티커들이 붙어 있었는데 아마도 고향이 남미 어딘가인 듯했다. 조수석 쪽 창문은 손잡이로 돌려서 여는 창문이었는데 그나마도 깨져 있었다. 차 안은 꽤 더러웠고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많았는데 묘하게 아늑했다.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이 동네는 너 같은 여자 혼자서 돌아다니면 안 돼.” 그녀가 말했다.

“맞아. 그렇게 들었어.” 내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마침 내가 그 근처에 사니까 말이야. 하하하.”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더 말을 못 했다. 그녀는 더 말을 이어갔지만 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차 안에선 기분 좋은 향이 났다.

 

그녀는 말 그대로 윌리엄스버그 근처에 살았다. “여기가 내 집이야.” 하고 그녀는 자기 집 앞에 차를 세우고는 “저쪽으로 걸으면 바로 지하철역이 나올 거야.”하고 알려주었다. 땡큐, 땡큐 소머치를 연발하고 지하철역으로 냅다 뛰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물어볼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녀와의 만남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지던 그곳을 이후로 자주 가게 되었다. 평범한 동네였고, 활기찼고, 더는 무섭지 않았다. 귀가 뜨이고 입이 열려서인지, 눈에 익은 탓인지는 모르겠다.

 

가끔은 서울에서도 지하철을 타야겠다.

 

😺 셸리의 말 : 언젠가 핫펠트 작가와 '에세이 메일링캣 셸리'의 시즌2 작가들과 함께 모였을 때가 떠오르오. 새로운 주제로 '언젠가 지하철'을 안내하자 핫펠트 작가가 "나 지하철 타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하고 말했던 것이오. 그 순간 서로의 사이에 큰 강이 흐르는 듯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지하철을 탈 수 없을 만큼 바쁘거나 특별했던 그의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마음이 되었소. 이 글은 그가 원더걸스 예은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미국 이야기인 듯하오. 그 시절 그의 글을 나 셸리에게 보내주어 그리고 이것을 집사들과 함께 읽을 수 있어서 그저 고마울 뿐이오.

[셸리북스 에세이픽 6] 추석의 원고마감 테라피!_김민섭 작가 (by 벨라) [셸리북스 에세이픽 4] 이런 나로도 잘 살아보고 싶다_황보름 작가 (by 아돌)

댓글 달기

댓글 0
에세이 PICK16

셸리북스 에세이

2022.12.01 조회 86 발행일 2022-11-30
2022.09.28 조회 51 발행일 2022-09-28
2022.09.21 조회 79 발행일 2022-09-21
2022.09.14 조회 76 발행일 2022-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