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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리북스 에세이

[셸리북스 에세이픽 4] 이런 나로도 잘 살아보고 싶다_황보름 작가

발행일 2022-08-24

이런 나로도 잘 살아보고 싶다

 

우리 자매는 태어나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 내가 이 말을 하면 사람들은 믿지 못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반응이다.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한 번도 싸우지 않을 수가 있어? 그런데 그 친구들이 내 언니를 보면 “아, 이해가 된다.” 하고 말한다. 나와 분위기부터 사람 대하는 태도까지 많은 것이 다른 언니 때문이다. "너네 언니 정말 좋은 분 같아." 하고 내 친구들은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동의한다. "응, 언니는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언니와 내가 싸우지 않은 이유는 언니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니의 최대 장점은 언니가 가진 것에서 최대의 만족을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이다.

 

언니가 가진 것들은 많다. 언니의 삶, 언니의 가치관, 언니의 남편, 언니의 아들, 언니의 친구, 언니의 지인, 언니의 몸. 언니는 이 모든 것에 기본적으로 만족한다. 만족을 넘어 좋아한다. 내 것이기에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니가 좋아하는 것 중엔 나도 포함된다. 내가 내 친구들에게 "응, 언니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 언니는 언니 친구들에게 "나는 보름이가 좋아."하고 말한다. 내 말에는 언니에 대한 평가가 들어가지만, 언니의 말엔 나에 대한 평가가 들어가지 않는다. 언니는 그냥 나를 좋아한다. 내가 언니 동생이니까. 이런 식으로 언니는 언니의 과거를, 현재를, 부모를, 남편을, 아들을 너른 마음으로 좋아한다. 아마 언니는 언니의 미래도 좋아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언니와 나는 완벽한 타인이 된다. 우리는 엇비슷한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과거를 좋아하는 건 언니뿐이니까. 언니와 다르게 내 삶을 지배하는 건 늘 '뭔가 불만족스러운 느낌'이었다. 나는 늘 뭔가 좀 부족하다. 어쩐지 불만족스럽다. 어쩐지 여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어쩐지 내 과거가 아쉽다. 어쩐지 내 현재가 흡족하지 않다. 어쩐지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고, 어쩐지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할 것 같다. 불만족 때문에 매 순간 성마르게 나를 몰아붙이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니지만 문득,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또 내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뭐라도 이루려 애를 쓰고 있구나, 하고.

 

한동안은 치유할 길 없는 나의 불만족이 고민거리이기도 했다. 삶을 가로지르는 음습한 골짜기의 존재가 한 번씩 나를 고꾸라뜨리는 것 같았다. 짧은 기쁨, 짧은 행복, 짧은 만족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오래 이어지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재미있는 영화를 기분 좋게 보다가 영화가 끝나는 순간 후우 하면서 영화관을 나오는 것 같은 삶. 나도 밝고 긍정적인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으면, 나도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었으면, 나도 내가 가진 것들을 그 자체로 감사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나는 또 어느새 기쁨 후를, 행복 후를, 만족 후를 살아가고 있었다.

 

올해 들어 언니와 같이 살고 있어서 언니와 대화 나눌 시간이 많은데, 한 달 전쯤에 언니는 언니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도 잘 아는 언니의 대학 친구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번으론 만족하지 못해 수능을 다시 봐서 또 대학에 들어간 언니의 친구가 지금도 얼마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사실 자주 듣던 이야기였다. 내 머릿속에서 이미 그 언니는 꽤 오래전부터 불만족의 화신이 되어 있었으니까. 언니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다.

 

"언니가 아는 사람 중에 그 언니가 제일 불만이 많지? 제일 불만족하고 살지?"

 

"그렇긴 하지." 하고 대답한 언니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너돈데. 걔랑 너.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걔랑 네가 제일 세상에 불만족하고 살아. 자기 자신한테도."

"그 언니랑 나랑 같은 레벨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언니는 정말 불만족의 화신인데, 하고 생각하며 내가 되묻자 언니는 그걸 여태 몰랐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긴개긴. 걔나 너나. 둘 다 아주 징글맞게 자기 삶에 불만들이 많지. 좀 충격이었다. 내가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아니, 적어도 그 정도로 ‘보일 줄’은 몰랐다. 언니의 친구는 본인의 불만족을 친구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마구마구 쏟아내는 사람이라면, 나는 가면을 쓰고 그런대로 내 삶에 만족한 척하며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이니까.

 

갑자기 기분이 푹 다운된 나는 다시금 음습한 골짜기로 기어들어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법도 모르고 이 나이가 되어버린 내게 불만족하며. 그걸 또 언니에게 다 들켜버린 어설픈 나에게 셀프 쯧쯧거리며. 좀 민망하고, 창피하다 느끼며. 그래서 맥주를 괴롭고도 시원하게 원샷하는데, 언니가 지금까지 한 말과 달리 반전을 주며 내게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너네 둘 정말 열심히 살아.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변화하는 사람이 딱 둘인데 바로 걔랑 너야. 본인들은 힘들겠지만, 옆에서 보면 멋지기도 해. 계속 배우고 노력하고 성취하고 그러는 거. 그거 쉽지 않은 거잖아."

 

아이씨, 언니가 병 주고 약 줬어, 생각하면서도 나는 금세 약에 취해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삶에 불만족하는 나 자신에게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삶에도, 자기 자신에게도 불만족하는 나는 별론데, 그래도 끊임없이 뭔가를 계속 시도하고 있는 나를 나는 좀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더 나은 나를 바라며 무언가를 행할 때마다 그 행동의 근저에 불만족이 있는 거라면, 그 불만족은 내 삶에 꼭 필요한 무엇 아닐까. 사실 언젠가부터의 나는 이제 이런 나를 받아들이고 이런 나의 단점도 포용하자는, 더 높은 차원의 만족에 다다르려 노력하고 있기는 했다. 오죽하면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이런 문장을 옮겨 놓기까지 했을까. 무용수 마사 그레이엄이 한 말이다. '우리를 전진하게 하고 누구보다 더 살아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신성한 불만족 즉, 은혜로운 불안을 찬양한다.'

 

어쩌면 나는 평생 자족하는 사람이 될 수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씩 변화하며 계속 성장하는 사람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나아지려는 내 안의 욕망을 모른 체하지 않고 그 욕망의 손을 들어주는 꽤 자기 친화적인 인간인 것은 아닐까. 아직 내 안엔 끄집어내 지지 않은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을 찾는 순간 내 불만족도 끝이 나는 것 아닐까. 만약 딱 떨어지는 가능성을 찾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참 오래도록 무언갈 도모하고 시도하고 노력한 내 삶은 그것대로 괜찮은 삶이 되는 것 아닐까. 나는 요즘 이런 식으로 긍정 회로를 돌리며 나의 불만족에 적응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 다시 태어날 순 없으니, 이런 나로도 잘 살아보고 싶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는 나에게서 그닥 벗어나지 못할 것 같으니 다음의 삶은 욕심 내고 싶지 않다. 내게 삶은 딱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

 

 

😺 셸리의 말 : 우리는 누군가에게 완벽한 타인이지만 봄날의 햇살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지 않겠소. 나 셸리도 집사들에게 언제나 봄날이기를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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