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티티빌루스와의 동고동락

언제? 2021-02-15

 

  지난 글에서도 적었습니다만, 저는 주로 북크루에서 책장 위 고양이 메일링과 관련된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일을 제작하고 독자크루분들께 보내드리는 일의 첫 단계는, 작가들로부터 원고를 입수해 원고를 교정하는 일로 시작하지요. 예컨대 오늘은 김사월 작가의 원고를 봤습니다.

 

  다만 제 딴에도 몇 번씩 글을 보고 맞춤법 검사기까지 활용할뿐더러 저 외에 다른 북크루 소속 크루들도 메일을 미리 검수합니다만, 여전히 실수는 발생합니다. 가장 큰 대형 사고로는 아예 작가 이름이 잘못 기입된 메일이 그대로 독자크루분들께 간 일이 있었습니다.

 

  또한 아마 저 외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홀로 괴로워하는 실수들도 있어요. 예컨대 '그전'이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 표재어로 등록되어 있고 띄어쓰기의 원칙은 낱말을 띄어쓴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그전"이라 표기했습니다만, 알고보니 '그전'의 정의는 "지나간 지 꽤 되는 과거의 어느 시점을 막연하게 이르는 말"이더군요. 에세이 본문에는 기준이 되는 특정 시점이 정확히 명시되어 있었고, 작가가 의도한 바는 막연한 과거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전'이라 적었어야 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직장에서 제가 (혼자서) 괴로워하는 일들 중 많은 부분을 이런 것들이 차지합니다. 

 

titivillus.jpg

 

  하지만 저 혼자 끙끙 앓는다고 누구에게 좋은 일이겠어요. 아직 저는 글과 관련해 그리 대범하지 못하지만, 여하튼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대범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이렇게 한 마디 뱉고는 잊어버리려고 하면서 말이죠. "이게 다 티티빌루스 탓이야!"

  티티빌루스는 1285년경 웨일스의 존이 작성한 Tractatus de Penitentia에 처음으로 언급되는 언급되는 악마입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중세 서양에서 책이란 상당한 사치품이었어요. 애초에 종이도 우리에게 익숙한 종이가 아니라 값비싼 양피지였죠. 게다가 필경사들이 일일이 손으로 베껴 책을 만들어야 했으니, 얼마나 귀한 물건이겠습니까.

  자, 이제 중세의 필경사에 이입해봅시다. (이름은 존이라고 해두죠.) 당신은 존, 평화로운 수도생활을 꿈꾸며 수도원에 들어왔지만 왠지 종일 하는 것이라고는 책상 앞에 앉아 깃펜으로 책을 베끼는 일입니다. 어깨와 허리는 매일 비명을 지르고, 마지막으로 눈이 맑았던 게 언제인 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현세에서의 이 고행도 의의가 있겠거니 하며 꾸역꾸역 오늘도 글자를 적어나가는데, 오호애재라, 단어의 철자를 틀리고 말았네요. 수도원장의 표정을 살피면서 조심스레 양피지를 살살 긁어봅니다. 아마 이 양피지 한 장은 당신이 하루에 먹는 밥값보다 비쌀 거예요. 그런데 쉽지 않네요. 당신은 목소리를 낮춰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다 티티빌루스 탓이야!"

  중세 문헌들에 따르면, 티티빌루스는 필경사들로 하여금 오탈자를 저지르게 하는 악마입니다. 그는 매일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글을 적을 때 저지른 문법이나 철자법상의 실수 등을 1,000개씩 모아 자기 상사인 사탄에게 가져다 줘야 해요. 그리고 악마에게도 빠른 퇴근은 간절한 모양인지, 그는 경건한 필경사들을 미혹하여 실수를 저지르게 합니다.

  아마 시간이 흐르며―어쩌면 웨일스의 존이 그의 존재를 알린 탓에―필경사들은 점차 티티빌루스의 유혹에 저항하는 법을 익힌 모양입니다. 15세기경 문헌에서 어느새 티티빌루스는 미사 중 잡담하는 여자들의 이름을 적고 있다고 하거든요. 맞춤법이 틀린 구문을 찾기가 얼마나 녹록지 않았으면, 악마가 자신의 전문 분야마저 벗어나 성당 안에서 남들이 잡담을 하는지 안 하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어야 할 지경이 되었을까요.

  지난 시간 제가 교정 과정에서 잡지 못하고 내보낸, 그리고 앞으로도 내보낼 오탈자들을 생각하며 티티빌루스를 떠올립니다.  전 맞춤법이 틀린 구문들을 일부러 만들 생각이 없으니, 아마 책장 위 고양이 메일에 있는 그 모든 오탈자는 티티빌루스 탓이겠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애잔하기도 합니다. 어떤 문구가 틀렸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도 맞춤법을 잘 알아야 하겠지요. 그리고 맞춤법이 틀린 문구를 천 개씩 찾기 위해서는, 결국 그도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할 겁니다. 악마 치고는 참 좀스럽기 짝이 없는 팔자입니다.

   비록 서로 다른 결과를 추구하지만, 최소한 업무의 과정상에서 저와 티티빌루스는 한동안 일종의 동업자로서 계속해서 동고동락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불쌍한 악마가 아닐 수 없네요.

  물론 그가 아무리 불쌍하다 한들 그의 이른 퇴근에 협조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앞으로도 저는 티티빌루스의 담당 업무를 최대한 방해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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