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똔이 읽는 것

언제? 2021-02-09

  안녕하세요, 북크루에서 주로 책장 위 고양이 메일링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안똔입니다.

 

  북크루 블로그에 어떤 글을 쓸까 생각하다 보니, 제가 회사에서 하는 일에 관한 글은 읽는 분께도 그럴뿐더러 쓰는 제 입장에서도 그리 재밌을 것 같지 않더군요. 원고를 받고 편집해서 메일을 제작한 뒤 구독자분들께 발송합니다. 이렇게 제 업무는 매주 비슷하게 반복됩니다. 원고를 편집하는 과정에는 나름의 재미가 없지 않습니다만, 그것에 관해 읽어보시는 일이 아주 흥미진진한 경험일 것 같진 않네요.

 

  한편 제 일상도 요즘은 특별히 재밌는 일이 없은 지 좀 오래입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제가 그럭저럭 재밌게 쓸 수 있겠다고 떠올린 것은, 제가 요새 읽고 있거나 읽어본 글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북크루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여러분 모두, 글과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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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제가 읽기 시작한 글은 러시아어판 『파이드로스』입니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출판소Типография Российской Академии наук에서 1923년부터 발간하기 시작한, 15권짜리 플라톤 전집의 제5권에 실려 있는 판본이죠. 저작권이 풀려 있는 덕에, 플라톤 전집을 인터넷에서 그대로 다운로드한 후 인쇄해서 읽을 수 있어 아주 흡족합니다.

 

  이 판본으로 『파이드로스』를 읽기 시작한 것은 이것이 제가 플라톤의 저작 중 좋아하는 대화편이기도 할 뿐 아니라 제 관심사와 관련해 『파이드로스』의 내용을 복기할 필요성도 느낀 동시에, 이러다가는 기껏 배운 러시아어를 다 까먹겠다는 약간의 위기의식이 엄습했기 때문이에요. 제 노어 실력이 한국어로 읽어도 어려운 플라톤을 얼음에 박 밀 듯 노어로 줄줄 읽어내릴 수준은 아닌 까닭에, 두 판본의 영역본과 이제이북스에서 펴낸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의 『파이드로스』도 같이 보고 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러시아과학아카데미출판소의 편집자가 본문을 안배해둔 대로 매일 한 장씩 읽으려 했는데, 쉽지만은 않네요. 제 게으름 탓이 크지만 그래도 한 가지 핑계를 찾아봅니다. 원래는 벤저민 조윗Benjamin Jowett의 영역본을 참조하고 있었는데―이 또한 저작권이 만료된 판본이죠―친구 한 명이 알려주길 영역본은 조윗의 역본보다는 Hackett Publishing Company에서 1997년에 펴낸 플라톤 전집을 보는 게 낫겠다고 하더군요. 어떤 판본을 같이 볼까 둘 사이에서 진동하다가 결국 둘 다 보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조금의 지연이 있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파이드로스』는 굉장히 흥미로운 문헌입니다. 흔히 사랑에 관해 플라톤이 쓴 대화편으로 『향연』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향연』만큼 유명하진 않아도 『파이드로스』에서도 주요 제재로 사랑이 등장하며 사랑에 관한 플라톤/소크라테스의 여러 흥미로운 기술들을 발견할 수 있어요.

 

  또 재밌는 것은 사랑에 관해 한참 이야기하던 화자들의 대화가 어느새 연설법에 관한 대화로 넘어간다는 점입니다. 물론 대화편이라는 장르적 특성이 있을 것이고, 제가 보기에 플라톤이 아주 치밀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에서 이 정도로 두서없는(?) 전개가 자주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죠. 아마 플라톤에게 어떤 의도가 있긴 했을 텐데, 왜 그랬을지는 제가 과문한 관계로 잘 모르겠습니다.

 

  플라톤 텍스트의 구성에 관한 이야기를 이 이상으로 했다가는 모르는 것에 대해 저 자신도 모르게 아는 척하는 일이 될 듯합니다. 고로 저도 『파이드로스』의 저자 플라톤처럼, 플라톤을 노어로 읽는 경험에 관한 이야기로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 봐야겠어요. 우선 사진에 보이듯, “Φαῖδρος/파이드로스/”라는 이름이 노어에서는 “Федр/페드르/”가 된 것이 이채롭습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러시아에서 말을 할 때 모음 발음을 많이 뭉개버리는 모양이에요. 하긴, 고전기 희랍인들이 보기에 우리 한국인들이 “Φαῖδρος”를 “파이드로스”라고 다섯 음절로 발음하는 것 또한 색다르게 느껴지겠죠? (네, 이 이야기를 하려고 “Федр”라는 제목이 나오도록 사진을 찍은 게 맞습니다.) 

 

  한편, 『파이드로스』를 노어로 읽은 덕에 한국어로 읽었을 때 그리 유심히 보지 않았던 대목 하나를 재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최선두의 첫 행입니다.  『파이드로스』의 대화를 시작하는 소크라테스의 첫 마디를 국역본에서는 “여보게 파이드로스, 대체 어디 가나? 어디서 오는 길이고?”(김주일 역, 『파이드로스』, 이제이북스, 2017, p. 45)라고 새깁니다. Hackett판에서는 “Phaedrus, my friend! Where have you been? And where are you going?”(p. 506)이라고 적고 있고요. 산책하러 나온 파이드로스를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교외에서 마주친 상황이기에, 특히 여기의 국역과 영역으로 보기에는 일상적인 인사말 정도로만 느껴집니다. (한편 조윗은 같은 행을 “My dear Phaedrus, whence come you, and whither are you going?”이라고 옮기는데, 19세기식 영어 특유의 고어체도 재밌지 않나요?)

 

  반면 노어판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Любезный Федр, куда и откуда?” (혹시 이 부분도 사진에서 보이시나요?) 노어를 이해하지 못하시더라도, 길이만 봐도 국역본이나 영역본에 비해 훨씬 간결한 번역이라는 점을 파악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한국어로 새기면 ‘친애하는 페드르, 어디로 그리고 어디로부터?’ 정도가 되겠네요.

 

  노역본을 보고 연후 희랍어 원문을 확인해보니, 과연 원문은 “ὦ φίλε Φαῖδρε, ποῖ δὴ καὶ πόθεν;”로 간결하더군요. 즉, 희랍어 원문에는 ‘가나?’나 ‘going’, ‘오는 길이고?’나 ‘come’, ‘have you been?’ 등에 정확히 조응하는 표현이 없고, 이를 직역해보자면 ‘친애하는 파이드로스, [대체, 지금…] 어디로 그리고 어디로부터?’에 지나지 않습니다(δὴ에는 ‘대체’나 ‘지금’ 정도의 뜻이 있지만, 어떤 이야기를 꺼낼 때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제가 언급한 국역본, 영역본, 노역본 중에서는 노역본이 플라톤의 원문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겠죠.

 

  국역과 영역에 이해를 돕기 위한 의역이 있었다는 점은 십분 이해하고, 이를 폄훼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다른 다소 번다한 말들이 삽입되니 문예비평(?)적 시각에서는 “ποῖ δὴ καὶ πόθεν;”에 집중된 극적인 효과의 빛이 바랜다는 감상을 떨칠 수 없더군요. ‘어디로? 그리고 어디로부터?’―철학의 대화를 시작하기에 탁월하고도 간명한 물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후 이어지는 대목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혀를 빌려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본디 혼들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 천계를 순례합니다. 그리고 천계 바깥에 참된 실재가 있어, 꼭대기까지 다다른 어떤 혼들은 이를 관조하며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추하거나 나쁜 것에 의해 날개의 깃털을 잃은 혼은 흙으로 된 몸을 취하게 됩니다. 즉, 지금 우리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소년을 보고 사랑에 빠지면―플라톤이 말하는 사랑, 혹은 에로스란 일차적으로는 고대 아테네에서 성행했던 소년애입니다―, 우리에게서는 다시금 날개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혼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 아래의 하찮은 것들로부터 벗어나 다시금 저 높은 곳의 천계 그 너머로 날아오르려 하는 것입니다. (245c-257b, 김주일 역 『파이드로스』,  p. 81-100)

 

  플라톤/소크라테스의 첫 질문과 연계하여 사랑과 상기에 관한 플라톤/소크라테스의 위 언술을 되새긴다면, 우리는 문제의 질문을 다음과 같이 변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지금 날개를 단 채 참 그 자체, 아름다움 그 자체를 관조하던 그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느냐? 그리고 너는 사랑을 하며, 잃어버렸던 날개를 다시 기르고 그곳으로 날아올라 돌아가려 하고 있느냐? 너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느냐?

 

  이런 견지에서 『파이드로스』의 245c-257b를 마무리하는 플라톤/소크라테스의 기도는 사뭇 감동적입니다. “경애하는 에로스여, 이것이 우리의 힘이 자라는 대로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게 불러 당신께 헌정하고 빚을 갚는, 고쳐 부르는 노래입니다. […] 자애와 자비를 베푸시어, 당신이 제게 주신 사랑의 기술을 분노로 인해 거둬 가시거나 상하게 하지 마시고, 아름다운 자들 곁에서 지금보다 더욱더 소중한 사람이 되도록 해 주소서. […] 지혜사랑으로 발길을 돌리게 하셔서, 그를 사랑하는 여기 있는 자가 더 이상 지금처럼 두 의견 사이에서 어물거리지 않고, 오로지 지혜를 사랑하는 이야기와 더불어 사랑을 향한 삶을 꾸릴 수 있도록 하소서.”(상게서,  p. 99-100) 너무나 뻔한 말이지만, 이곳에서 플라톤/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혜에 대한 사랑이란 곧 철학일 것입니다.

 

  이미 한 차례 이야기한 것이지만 전 플라톤의 대화편 중 『파이드로스』를 굉장히 좋아하고, 지금까지 쓴 것만으로도 제가 왜 『파이드로스』를 좋아하는지 충분히 설명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제 과잉해석일 공산을 배제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사랑과 비상에 관한 언술이 『파이드로스』의 포문을 여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첫 질문부터 예비되어 있었다는 점은 제가 노어로 『파이드로스』를 읽지 않았더라면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즘 제가 무엇을 읽는지 소략히 남겨보려 했던 글이 다소 길어졌네요.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을 곱씹는 동시에,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금 날개가 자라 날아오를 수 있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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