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이 액자가 되는 계절' 이라는 구절이 맘에 와닿았습니다.
새벽부터 차오르는 햇살을 막아보려고 두꺼운 커튼을 드리우고 있는 제 방의 창문을 바라봅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벚나무의 싱그러움에 반해 이 방을 선택했다는 기억을 떠올립니다.
영화의 반전 같은 다음 기억이 떠올랐어요.
어느 햇살 좋은 아침, 두꺼운 커튼에 가려진 아침 햇살이 평소보다 밝아진 거에요.
'뭐지?'하고 반쯤 깬 상태에서 들려오는 '웽~'하는 모터소리.
"뭐야?"하고 창문을 열어보니......
싱그러운 벚나무가 마법처럼 사라졌더군요.
냉큼 침대에 올라서서 창틀에 손을 짚고 아래까지 내려다보았어요.
잘린 나무 기둥만 겨우 남아 있었습니다. 줄지어 있던 나무들도 모두 그렇게 잘려 나가고 있더군요.
마음이 공허하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실감한 순간이었어요. 허무함 같기도 했습니다.
상가의 간판을 가린다는 이유로 도심 가로수 60그루가 한 번에 잘려 나갔다는 뉴스를 봤어요.
화가 나고 안타까웠지만 남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매일 아침 지하주차장 입구로 떨어진 나뭇잎을 쓸어야 했던 경비아저씨의 노고를 덜 수 있겠다는 생각은 나중에야 들었습니다.
이후엔 창문은 두꺼운 커튼이 늘 드리워져 있습니다.
창 밖 벚나무의 가지와 잎이 마주보는 아파트와 제 방의 가림막 역할까지 했었는데.
이제 창을 열면 낯선 집 거실이 환하게 보입니다.
실례가 될까하는 마음에 커튼을 열지 못합니다. 벚나무 드리워진 창문이 그립습니다. 방 한 가득 액자가 되어줬던 벚나무가 그립습니다.
오늘의 에세이를 읽으며 울컥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네요.
선생,
가히 글이란 신기한 것이지 않소? 지금은 지나가 버린 어느 한때의 기억 속으로 독자를 데리고 가니 말이외다. 그러고보니 이 고양이로서는 그대의 글을 읽고 또 이 말을 하고 난 후니 내 사귀었던 옛 벗이 생각나는데, 그 또한 작가였으나 그의 글 쓰는 모습을 어찌 설명하면 좋을까―이렇게 말하면 되겠구려! 그는 《마들렌》 먹기를 참으로 느릿하게 하는 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을 쓴 이였소이다. 혹시 누군지 짐작이 가오?
셸리
렌지님, 저는 이번 글을 쓰면서 사람의 눈이 창문과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벚나무는 없어졌어도 기억하는 눈이 있으니 다행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귀한 답신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주에 또 뵐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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