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 팟캐스트 진행자의 문학에서 영화까지, 문화로 얻는 내 삶의 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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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명 허희
✏️ 필명 허희
📚 저서 2019, <시차의 영도>
📹 강연방식 현장강연, 원격강연(실시간), 원격강연(사전녹화)
🏫 초청기관 독서모임, 도서관, 대학교, 기업, 공공기관, 단체
🎓 강연대상 교사, 학부모, 직장인, 프리랜서,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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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의 영도

 

허희 작가는 누구인가요?

  • <시차의 영도>(민음사, 2019)를 쓴 허희 작가는 교보문고 소설 팟캐스트 낭만서점 진행자로 지내면서, 문학과 영화에 관한 글을 쓰고, 라디오와 TV에서 문화 이야기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그의 주요 이력은 아래와 같습니다.

  • 방송:  <TV 책을 보다>(KBS), <문화사색>(MBC), <TV 책방 북소리>(tbs), <오유경의 인생 책방>(국회 방송), <본격연예 한밤>(SBS) 등

  • 강연: 인생학교 서울, CGV 아트하우스 스크린 문학전, 메가박스 팝콘 클래식, YES24 소설 학교, 종로의 이야기꾼 전기수, 경기콘텐츠코리아 랩 창의 세미나, 부천-용인-화성 문화재단 특강, 성균관대-성신여대-제주대 특강, 서강 도서관-파주중앙도서관 특강, 한국근대문학관 특강, 웅진씽크빅 특강, 현대인재개발원 리더의 서재 등

  • 활동: <문학 선> 편집위원, <쿨투라> 기획위원, 서울예대 출강

     

이런 분들께 작가의 강연을 추천합니다

  • 북크루는 문학과 영화를 아우르는 문화 전반에서 특별한 인사이트를 얻고 싶은 분들께 허희 작가를 추천합니다.
     

강연 이후 우리는...

  • 사회적 문화와 개인적 삶연결시켜 > 세상과 본인에 대한 섬세한 질문을 던지고 > 그 해답을 찾도록 도와드립니다.
    • 감정 교육 - 느낌은 능력이다
    • 교차 해석 - 문학 읽기와 영화 보기
    • 읽기와 쓰기의 진화 - 책의 과거 현재 미래
    • 영혼을 잠식하는 우리 시대의 불안 - 불안정 노동에 관한 몇 편의 작품들
    • 사랑에 대해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 - 연애와 결혼의 문학사회학
    • 어째서 모두 이렇게까지 고독해져야만 하는 것일까 - 홀로인 채로 함께

 

 

작가 스토리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와 고독의 연대" 

 

 

안녕하세요? 허희라고 합니다.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상실의 시대』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이 주제의 강연 제안을 받았을 때는 할까 말까 상당히 망설였습니다. ‘하루키’라는 고유명사는 하도 널리 쓰여서 이제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보통명사처럼 사용됩니다만, 그만큼 사람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은 객기밖에 없고, 그의 전작을 읽어 온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평론을 쓰는 사람으로서 하루키 작품에 대해 무언가 말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렇게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

 

제가『상실의 시대』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02년입니다. 그때부터 벌써 문학청년이었느냐고요? 설마 그럴리가요. 입시 준비에 좌절하고, 남자만 득실거리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더 깊이 좌절하던 저는 문제집을 사러 서점에 갔다가『상실의 시대』를 발견했습니다. ‘세상에! 제목이『상실의 시대』라니.’ 시험 점수도 떨어지고 그러면서 꿈도 잃어가는 저의 내면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문제집을 사러간 돈으로 이 책을 사게 되었습니다. 물론 부모님께는 문제집을 샀다고 거짓말을 했지요.『상실의 시대』를 통해 저의 상실을 극복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이 더 복잡해졌습니다. 원래 문학은 정답을 제시하는 예술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나름대로의 답을 찾게 하는 과정의 예술이기니까요.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차원적인 탐구를 했다기보다는 성(性)과 관련된 상념에 빠져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인생을 정의하는 사람보다는 신중하게 인생에 접근하는 사람을 신뢰합니다. 그는 인생에 대해 말할 때 ‘인생은~이다.’라는 단정형이 아니라 ‘인생은~일지도 모른다.’라는 추측형의 화법을 구사합니다. 예컨대 하루키는 최근작인『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이렇게 씁니다. “우리네 인생에는 어떤 언어로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 법이죠.” 데뷔작부터 지금까지 그는 순리를 의심하고 역설을 옹호합니다. 가령 이런 식입니다. “어이, 이런 거 엄청난 패러독스라는 생각 안 들어?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돼. 그리고 발견할수록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는 거야.” 소설 속 등장인물 누구의 발화이든 관계없이 이것은 하루키의 일관된 태도이며 그가 이른바 ‘꼰대’가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

 

하지만 60년 넘게 세상을 산 하루키(1949년생)보다 어린 연배의 어떤 ‘어른’들은 종종 (실은 아주 자주) 후속 세대에게 자신의 삶을 따르도록 강요하고는 합니다. 그 행태에 숨이 막힐 때마다 저는 하루키의 글을 마치 산소마스크를 착용하듯 찾아 읽었고 그러면 조금은 숨통이 트였습니다. 정답은 이미 나와 있으므로 그곳을 향해서 정해진 길을 따라 열심히 가야한다고 가르치는 사회에서, 하루키는 굳이 거기에 따를 필요가 없음을 맥주와 재즈와 성을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하루키의 책을 접하게 되면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편안하게 살기는 어려워집니다. 평탄하게 살려고 하면 눈을 감고 귀를 막아야만 하는데, 그의 작품은 술과 음악으로 매혹하면서 자꾸 이것저것 보고 듣게 만듭니다. 그러고는 캐릭터에 몰입한 독자로 하여금 사랑과 이별을 거쳐 죽음과 방황을 겪게 한 뒤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장으로 이끌어 놓습니다. 가히 하루키 소설의 서사 문법이라고 할 만한 일련의 경로를 체험하고 나면 도저히 예전의 생활로는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수많은 하루키 애독자, 아니 하루키 중독자의 탄생은 아마 이렇게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평상시에는 자명하다고 인지하지만 실은 불명확한 것들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내던져진 현존재로서의 인간, 우리의 실존부터가 바로 그러하지 않습니까. 예전 국민교육헌장에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구절이 쓰여 있기도 했습니다만, 애당초 목표가 정해진 출생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우선은 그저 목적 없는 삶을 살아내야만 합니다. 그것은 마치 과거에는 신이 머물렀다고 알려진, 그러나 현재에는 신이 없는 장소에 가는 순례와 유사합니다. 순례자가 실재하는 신을 찾으려고 순례를 떠나지 않듯이 인간이 명시적인 목적을 추구하려고 살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도착의 안도보다 중요한 것은 여정의 순간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헤매고 헤매는 방황의 서사인『상실의 시대』를 그토록 많은 독자가 찾아 읽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저도 학업·취업·연애·병역 등으로 고민하면서, 소위 ‘88만원세대’인 20대로서 불안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살아내는 동안『상실의 시대』를 되풀이해서 읽었습니다.

 

하루키 작품에서는 어떤 사건의 동기가 무엇이었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부차적인 일에 불과합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결과의 합리적인 원인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상실의 시대』를 쓴 목적을 하루키는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간명한 테마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명확한 이유를 댈 수 있을까요. 어쩌면 진정한 논리는 궤변처럼 들릴 지도 모릅니다. ​

 

그런데 이것이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하루키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하나의 시대를 감싸고 있었던 분위기라는 것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동시에 외적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단순히 내밀한 남녀의 연애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만나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내는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설령 잃어버린다고 해도 그 가치는 퇴색하지 않습니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협소한 의미의 사랑을 조금씩 확장시켜나가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한 지평에서 사랑은 상실마저 수렴하니까요.

 

『상실의 시대』의 주요 화소이기도 한, 영국의 밴드 비틀즈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난 혼자였어, 그 새는 날아가 버린 거야.” 그 새는 대체 어디로 날아간 것일까요? 새가 의미하는 사랑했던 여인도, 젊었던 시절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까 하루키 소설의 구절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상실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자기 자신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하루키는『상실의 시대』에서 그러한 냉혹한 등가교환의 법칙을 명징하게 증명합니다. 새는 날아가 버렸지만 어쩌면 그 새가 실은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을 다시 들여다봄으로써 그 새를 다시 발견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하루키와『상실의 시대』를 읽고 이야기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속의 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묻듯이, 자기만의 새를 찾기 위해 우리도 스스로에게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끊임없이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 시간 여러분께서도 이와 같은 질문에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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