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크루 BLOG

크루들의 좌충우돌 항해일지

다니엘 브라이트 작가님의 영시를 번역해보자!

언제? 2021-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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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25일, 책장 위 고양이 메일로 다니엘 브라이트 작가님의 에세이 「나는 시인이 아니다」가 배송되었습니다. 셸리 메일 독자크루분들께서 즐겁게 읽으셨다면 좋겠어요.  책장 위 고양이 편집자로서 제가 느끼는 보람은 독자크루분들이 매일 아침 6시에 도착하는 메일을 반겨주시고 재밌게 읽어주시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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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세이 본문에서 다니엘 브라이트 작가님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쓴 시 「The Pianist」를 소개해 주셨어요. 영어로 된 본문도 보내주셨지만 시를 한국어로 직접 옮긴 번역문도 원고에 포함되어 있었죠. 그런데 편집자 입장에서 브라이트 작가님의 번역을 읽다보니 조금은 아쉬운 점이 있었어요. 아시다시피, 시란 산문이 아니잖아요? 게다가 브라이트 작가님의 원문은 나름의 리듬감도 잘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곳곳에 라임, 다시 말해 각운까지 맞춰둔 작품이었습니다.

   원고를 받아본 아침, 저는 브라이트 작가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책장 위 고양이 편집자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원고 잘 봤습니다!"

  "네, 네!"

  "그런데 원고 중에 시 있잖아요, 영어로 보니까 본문에 라임이 되게 많던데요."

  "네, 네!"

  "그게,  번역도 참 잘해주셨는데, 아쉬워서요. 이걸 라임을 살리는 방향으로 새로 번역을 해볼까 하거든요. 시라는 특성이 있잖아요. 리듬도 중요하고."

  "네, 네!"

  "혹시 작가님의 기존 번역이 많이 바뀌어도 될지..."

  "네, 네! 번역은 많이 바꾸셔도 됩니다!"

  예상보다 빠르게 통화를 마치고 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음, 정말 오직 "네, 네!"라는 대답으로 일관하는 분이셔서 좋군. 오도는 일이관지라, 혹은 그래설라무네, 단 작가 가라사대, 오도는 예스이관지니라 하시니, 불역락호아? 가벼운 마음으로 번역에 착수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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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_창작으로부터_오는_고뇌가_느껴지십니까.jpg

 


  다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더라도 작업은 가볍지 않더군요. 독자분들께서 번역된 시를 읽을 때, 원문을 읽을 때와 최대한 근접한 리듬감을 느끼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우선 브라이트 작가님의 원문에서 각 행의 음절을 셌어요. 예컨대 마지막 연에 등장하는 네 행의 음절 수는 아래와 같습니다.

 

 

      He doesn’t hear,

       1        1             1

      I ask again.

     1   1        1

      He smiles like

        1        1         1

      All good Polish men.

        1      1           2         1

 

 

  당연한 말이지만, 음절 수가 많을수록 하나의 구(句)나 행의 길이는 길어지고 적을수록 짧아질 겁니다. 그리고 각각의 구와 행의 길고 짧음에 따라 구와 구 사이에, 행과 행 사이에 리듬이 생기겠죠. 간단히 말해서, 저는 브라이트 작가님의 시를 한국어로 읽더라도 원문에서 긴 부분은 길고 또 짧은 부분은 짧기를 원했어요.

 

  처음에는 국역본에서의 음절 수를 영어 원문의 음절 수와 동일하게 맞춰버릴까 했어요.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제 이번 번역 경험에 기초해 말씀드리자면, 같은 수의 음절로 전달할 수 있는 의미가 한국어는 영어에 비해 적더라고요. (보통 한국어로 글을 쓰면 같은 내용의 영문보다 짧아지지 않냐고요? 그렇게 보이는 것은 로마자로 풀어쓰기하는 영어의 표기법과 달리 한국어와 한글에서는 모아쓰기를 하기 때문일 겁니다. 예를 들어 '홍길동'은 세 글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ㅎㅗㅇㄱㅣㄹㄷㅗㅇ'의 아홉 글자인 거죠.)

 

  저는 고민 끝에, 한국어 번역본에서의 행별 음절 수를 원문의 2배로 정했습니다. 또한 가능하다면 행 내의 구별 음절 수에서도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어요. 즉, "He doesn't hear,"는 총 3음절이니 국역본에서 이 부분에 해당하는 행은 6음절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어쨌든 원문과 음절 수가 똑같지는 않지만, 이 비례가 유지된다면 번역문에서도 행과 행, 구와 구 사이의 상대적인 길고 짧음은 유지될 테니 브라이트 작가님이 의도한 원래의 리듬이 어느 정도 보전될 수 있는 것이죠.

 

  따라서 위 네 행은 아래와 같이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듣지 않네.
         2      2       2

      나는 다시 묻네.
         2      2       2

      그는 미소 짓지,
         2       2       2

      뭐든 좋을 파란(波蘭) 사내처럼.

         2      2            2                  4

 

 

  "그는 듣지 않네.", "나는 다시 묻네.", "그는 미소 짓지,"가 모두 6음절인 게 보이시나요? 1음절짜리 단어들로만 이루어진 3음절 길이의 행이 세 번 반복되다가, 네 번째 행에서 음절 수가 늘어나는 원문의 리듬은 이렇게 어느 정도 지켜졌습니다. '1-1-1' 음절의 영문 시행들로 구성된 원문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그 대신  '2-2-2' 음절 시행의 3회 반복으로 변주가 이루어졌으니까요.

 

  다만 원칙을 강하게 적용하자면 '1-1-2-1' 구성의 5음절짜리 행인 "All good Polish men."은 국역본에서 '2-2-4-2' 구성의 10음절짜리 행으로 번역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욕심 같아서는 아예 기계적으로, 행뿐 아니라 구와 단어 수준에서도 음절의 비례를 지키고 싶긴 했어요. 그러나 원문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거니와 국역본 나름의 아름다움도 문제가 되니, 언제나 칼같이 원칙을 고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뭐든 좋을 파란(波蘭) 사내처럼."은 행 전체 차원에서 보자면 영어 원문 음절 수의 2배라는 원칙을 지켰지만, 그 아래 차원에서는 기존 리듬이 어느 정도 깨져 '2-2-2-4' 구성이 되었습니다.  한편, 그런 중에 "Polish"의 역어로 무난한 '폴란드' 대신 상당히 고색창연한 "파란(波蘭)"을 채택한 것은 '폴란드'라는 3음절짜리 단어를 피해 그나마 나름 원문의 리듬을 지켜보려 했던 제 의도가 반영된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가능하다면 한 행의 총 음절 수만큼은 비례를 지켜보려고 애쎠봤으나 현실적으로는 행 차원에서도 음절 수 비례가 지켜지지 않은 곳들이 있습니다.  제 능력의 한계라면 한계일 것이고, 아쉬움이 전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글이나 문학은 결과물의 산출을 항시 그대로 기대할 수 있는 순수함수가 아니니, 때로는 겸허하게 느슨한 마음을 지닐 필요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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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 갖고 그만 싸우자, 나가자 진도"라는 스윙스의 말을 들어야 했는데, 제가 후회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습니다. (이미지 출처)

 


  번역할 때 그다음으로 의식했던 것은 각운이었습니다. 어쩌면 라임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실지도 모르겠네요. 브라이트 작가님의 원문을 보시면 더 이해가 빠를 것 같아요. 「The Pianist」의 제3연입니다.

 


      Sad sharp eyes, alive, alert


      That smile through smog, and soot, and dirt.


      Outside, a grey-brown sepia 


      Whole New World


      And his whole world


      Is nearly gone.


      An empty tune, so bare,


      With heart, abandoned but aware;


      A single star unfurled.
 

 

  각각 "alert"와 "dirt"의 말소리는 /ɜːt/로, "world"와 "unfurled"는 /ɜːld/로, "bare"와 "aware"는 /eə(ɹ)/로 끝납니다. 혹은 한글로 써보자면 '알러-트'와 '더-트', '워-드'와 '언퍼-드',  '베어-'와 '어웨어-'일 텐데요, 뒤쪽의 소리가 동일하다는 것이 보이시나요? 이렇게 각운은 반복을 통한 리듬의 형성에 일조하게 됩니다.

  원문의 리듬감을 살린 번역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각운을 살려보려고 애쓸 수밖에 없죠. 그 결과 나온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섧고 날 선 눈[目]들, 생기 돌고, 주시하는,


      스모그와 그을음과, 흙 사이로 빙긋이 웃는.


      바깥에는, 희끗한 갈색의 세피아빛


      온전히 새로운 세상.


      그리고 그의 온 세상


      거의 사라진 후다.


      비어 있는 곡조 하나, 퍽 헐벗은


      마음으로, 비록 버려졌을지언정 알 것은


      한갓 별 하나의 해방.
 

 

   "주시하는"과 "빙긋이 웃는", "세상"과 "해방", "헐벗은"과 "알 것은"의 말소리가 비슷하게 느껴지시나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의 각운을 지키는 일에 제 번역은 대체로 실패했습니다만, 원문의 뜻을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사실 브라이트 작가님의 각운을 번역하며 정말 고생했습니다. 각운을 맞춘 번역은 어떻게 하냐고요? 간단합니다. 그냥 각운이 맞는 번역문이 만들어질 때까지 끝없이 끼적여도 보고, 그래도 안 되겠다 싶으면 떠오를 때까지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고 있는 거지요. 이와 동시에 음절 수와 원문의 의미도 생각하면서요. "World"와 "unfurled"의 각운에 맞는 한국어 표현이 수 시간 동안 전혀 떠오르지 않아 이곳에서는 각운 지키기를 그냥 포기해버릴까 생각도 했는데, 다행히 브라이트 작가님 본인의 번역에서 "해방"이라는 낱말을 쓰는 것을 보고 쾌재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보통 저는 날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해도 하루 8시간 근무를 한다고 했을 때 원고의 편집까지 포함해 셸리의 에세이 메일을 두 통 정도 만듭니다. 그런데 아침에 출근해서 브라이트 작가님께 전화를 드리고 번역을 시작했고, 계속 번역에 골몰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더군요. 결국 「나는 시인이 아니다」로 고작 메일 한 통을 만드는 일이 끝난 때는 평시의 퇴근 시각을 넘긴 때였습니다.

  위에서 보여드린 것 외에 다른 각운 번역은 예컨대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춤"과 "깡충", "신부(新婦)를"과 "거부를", "다스리니"와 "경악스러우니", "현란한 채로"와 "현혹하는 채로", "웅취(雄臭)를"과 "당찮을 것을". 지금 보니 유사-각운(?)이라 하기에도 부끄럽지 않다고는 못할, 순 억지로 느껴지는 표현들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만에 이 정도로 해낸 게 어딘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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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해서, 제 번역이 음절 수와 각운을 고려한 번역이라는 점을 책장 위 고양이 에세이 메일을 구독하시는 독자크루 중 얼마나 많은 분들께서 알아봐주셨는지는 의문입니다. (실상 제 번역이라는 것도 메일 본문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지요.) 아마 단 한 분도 없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도 저 스스로 느끼는 보람이 없진 않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혼자서도 나름대로 뿌듯하거니와, 또 독자크루분들께 가능한 한 가장 갈고 닦인 상태로 에세이 메일을 보내드렸으니 여하튼 괜한 시간을 쏟은 것도 아니겠지요. 고로 저는 이 마음을 기억하기 위해 이런 글이나마 북크루 블로그에 남겨보는 것입니다.
 

댓글 1
  • 2021.2.26 19:56

    너무 자연스러워서 시조인줄 알았어요~~(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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